[오늘도 책을 만듭니다] 21 3년, 애증의 책
여느 때처럼 일하던 중, 상사가 나를 불렀다.
“새로운 책이 들어왔는데, 이걸 맡아서 했으면 좋겠어.”
일이야 늘 들어오고 나가니 그런가보다 했다. 담당 영업자를 만나 진행 상황을 들었다. 상사가 이미 작업하고 있다가 내게 넘긴 거라면서 시안부터 마무리해달라고 했다. 시안 작업 후 확정된 시안으로 조판을 시작했다. 상사에게 진행상황을 전달하니 그제서야 내게 말했다.
“이 책 꼼꼼히 해야 돼서 너 준 거야.”
그 때는 이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몰랐다. 이 책이 남길 후폭풍을 말이다.
“네, 교수님, 알겠습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수정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휴우-. 전화를 끊자마자 남아 있던 임원이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아직 안 갔나? 많이 바빠?”
“아, 수정사항을 전화로 전달해 주셔서요! 이제 가려고요.”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은 고요했다. 퇴근을 1시간 앞두고 걸려온 전화에 칼퇴근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왼쪽 어깨에 전화기를 걸치고 고개를 기울여 고정시킨 채 타이핑을 하며 저자의 말을 받아 적었다. 프린트한 교정지 여기저기에 붉은 펜으로 표시하기 바빴다. 그 사이 한 명, 두 명, 내게 인사하는 동료들과 눈을 맞추었지.
저자들은 보통 PDF나 교정지에 교정사항을 체크해서 보내준다. 설명이 부족하면 사진을 찍어 메신저로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의 대표저자는 교정지를 받으면 모든 수정사항을 유선으로 설명해주었다. 수정사항이 이해가지 않을 땐 바로 물어보고 정확히 파악하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통화는 평균 1시간 반 이상 이어졌으니 당장 너무 바쁠 땐 업무에 차질이 생겼다. 평균 열 권 정도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끼어드는 수정은 계획에서 어긋나 곤란했다. 피로도가 높은 일이었다.
학회에서 처음 발간하는 교과서라 신경을 많이 쓰는 책이었다. 더욱이 저자들은 포토샵, 파워포인트 등의 프로그램을 너무도 잘 다루었다. 나는 종종 동료들에게 의사 선생님들이 프로그램까지 너무 잘 다루신다고 투정부렸다. 그 말인즉슨 저자가 꼼꼼하고 정교한 교정을 원했다는 말이다.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에 부합하려 완벽을 추구하니 스트레스가 점점 커졌다. 이 책을 마무리하는 데 3년이나 걸렸다.
페이지마다 사진이 몇 장씩 있었다. 이미지는 너무 밝아도, 어두워도 안 되는 적정도를 지켜야 했다. 결과에 따라 병변이 달라져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병변을 가리키는 화살표도 일일이 표시했다. 의사가 아니니 어디가 병변인지 몰라서 저자가 원하는 위치에 화살표를 옮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인쇄 감리 때까지 흑백사진의 농도를 맞추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인쇄소 담당자와 기장님에게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가장 많이 했던 책이다. 때로는 저자가 미웠을 정도로 작업하면서 퇴사 충동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드디어 완성한 이 책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했다. 보는 사람마다 너무나 고생 많았다고 내게 축하인사까지 전했다. 나 역시 뿌듯함이 가득했다. 마지막에 저자와 인사를 나누는데 저자가 내게 직책을 물었다. 내가 팀의 막내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면서 그동안 팀장이 진행하는 줄 알았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울컥, 꾸욱 눌려있던 어떤 감정이 차올랐다. 내가 쏟은 정성을 저자도 느꼈다는 사실이 무척 고마웠다. 그러니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책!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서로 진심을 다하며 작업할 때 이 일 하기 잘했구나 싶다. 이런 저자를 만나는 것도 큰 행운이다. 그래서 더 잊을 수 없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