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실수투성이, 그래도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
수능날이 되면 반복적으로 올라오는 기억이 있다.
학력고사 세대인 나는 시험 전날, 시계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내 귀로 들어와 더 커져 심장소리와 함께 '쿵', '쿵'거렸다.
아침에 차려준 밥을 먹고 집을 나서다 골목길에서 '토'를 해버렸다.
아침 오전 내내 멍멍한 상태로 시험을 봤다.
따뜻한 보온 도시락통에 들어 있는 밥이 목에 넘어 가지 않았다.
솔직히 '시험을 망쳤구나'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역시나 난 3일 내내 울었던 경험이 있다.
재수를 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기에는 엄마의 굴곡진 주름이 더 해질 까 두려웠다.
아니 그건 핑계였다. 더 공부하기 싫었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교의 학과공부는 나랑은 맞지 않았다.
장학금은 탔으나,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내 꿈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등
의문을 의문으로 간직한 채 그렇게 4년을 보냈다.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 있다.
혼자 덩그러니 교실에 남아 시험을 본다.
벽에는 시계가 곧 종료됨을 알리는 조침이 분주히 움직인다.
시험지를 받아 적은 나는 아직 다 못채웠다는 강박적인 느낌으로 식은 땀을 흘리고 있다.
이제야 돌아보니, 그 때 나는 내 힘껏 다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전날 그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유는 내 스스로 미진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험보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동안 여러가지 경험의 도전을 한 까닭에 원일 모를 두려움의 박동이 시작되지 않는다.
그 때 내가 한 실수로 인해 인생의 방향성이 많이 바뀌었다.
우리 사회는 실수한 번으로 삶의 행로가 바뀐 경우가 많을 뿐더러,
다시 회복하는데 더 많은 장애를 가져다 주는 사회이기도 하다.
사실 실수는 뒤집어 보면 다른 방법으로 도전한 결과임에도,
우리는 실패라는 단어로 모든 과정을 덮어버리고 상자에 넣어 납골당에 봉인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도전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 학생들은 도전의식이 없다고 한다.
학습된 무기력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각인된다고 한다.
그건 누구에게 온것인가? 바로 부모, 주변 사회인들이 보여준 모습의 결과이다.
10대부터 이미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고 규정한다면,
어느 누가 그 네들을 동기부여해서 뛰게 할 수 있을 까?
어른의 의미는 '얼'이 성숙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른이지 못하고 꼰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꼰대=변화와 성장을 거부하는 사람들. 더 이상 배우기를 멈춘 사람들
세상 만물에 스승아니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오늘도 사소한 일상에서도 배우지 못한다면,
부처나 예수가 와도 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실수를 허용하고, 장려했으면 좋겠다.
그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용기가 생기고, 다른 방향이나 관점으로 바라보면
문제해결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패는 포기의 다른 이름으로 규정지고, 다시 도전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만 실패라는 딱지를 허용하자.
"괜찮아 나도 그랬으니까- 내 인생을 사는 법, 이근후 저"에서
한 후배 이야기가 나온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거의 갈 뻔한 후배는 평생 자신은 실패한 사람이라고 자괴감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러나,그는 적어도 8,800m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단지, 남은 거리를 악천후로 올라가지 못했을 뿐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 실패라는 말에 함몰되면 새로운 도전에 이르기 까지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괴롭히게 된다. 실패는 내 경험이고 나의 일부이다. 실패했다고 내가 나를 괴롭히면 어디서 에너지를 찾을 것인가?
'8,800m까지 올라간 사람'
'8,800m까지밖에 못 올라간 사람'
조사하나, 부사하나 만 바꿔도 성공한 사람이 된다.
실패한 사람은 없다.
정신과전문의인 이근후 박사는 10만번의 상담을 통해 터득한 경험들을 진솔하게 후배들에게 , 손주들에게 들려주듯 풀어쓰고 있다. 따뜻한 위로가 되는 말들이 녹아 있다.
실패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말자.
난 아이들에게 실수를 허용하고, 그 실수를 통해 다시 도전하는 용기를 가지도록 격려하는 하루를 보내려고 한다.
우리 오늘 "아름다운 실수"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