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맴돌다 -
1. 늘 맴돌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문득문득 코끝을 건드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는 바람이 약간 차다.
4개 동으로 이루어진 ‘늘봄’아파트에는 뚜렷하게 할 일이 없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소일거리로 삼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파트 주변으로 꽃나무가 듬성듬성 심겨 있고, 이제 기지개를 켜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랑 어르신들이 자주 모이는 아파트 놀이터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여러 사람이 앉아 쉴 수 있도록 벤치가 놓여 있다. 여기가 아파트 사랑방 구실을 하는 셈이다. 오늘도 몇 사람이 앉더니 머리를 맞대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어젯밤 옆집에서 부부 싸움 하는 통에 잠을 못 잤어. 요즘 젊은 부부들은 서로 배려하는 것도, 서로 아끼는 마음도 덜한 것 같아. 옛날 같으면 여자는 찍소리도 내지 못했는데, 요즘 엄마들은 대꾸도 잘해.”
배가 나온 작은 체구에, 둥그런 얼굴 모양을 하고, 머리는 뽀글뽀글 파마에 유난히 얇은 입술을 가진 할머니가 말을 꺼낸다.
본명 이 순애. 올해 65세이다. ‘늘 봄’ 아파트 101동에 살면서 이 동네 저 동네 모르는 소식이 없을 정도로 자칭 마당발이다. 가끔 자기가 모르는 정보나 소식을 다른 사람 입으로 듣게 되면 기분이 나빠 안색이 바뀌기도 한다. 2남 2녀 자식 중 첫째 딸만 결혼하지 않아 한집에 같이 살고 있다. 나머지 자녀들은 짝을 찾아 자신들의 터전을 가꾸고 있는데, 38살인 노처녀 큰딸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이 딸만 아니면 남부러울 게 없는데, 자랑하다가도 딸 결혼이야기만 나오면 이때만큼은 입을 다문다.
“아이고, 동생, 잠도 못 자고 힘들겠네. 예전에 나도 참 많이 싸웠지. 한 번은 싸우다 남편이 던 지 화병에 머리를 맞아서 병원에 간 적도 있어. 지금 이마에 있는 흉터가 그때 생긴 거야. 그때는 왜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살았는지 지금 돌이켜보니 참 부질없어.”
지난 일을 곱 씻듯 말하는 사람이 노영심 할머니다. 올해 68세다. 말할 때마다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그때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어르신으로 남편은 10년 전에 사별하였다. 166cm 키에 마른 체구를 지니면서 얼굴도 갸름하다. 한숨을 자주 쉬고 무릎 관절이 아픈 것 이외에는 크게 아픈 곳은 없다. 1남 1녀 자식 중 장남이 아직도 백수이다. 처음에는 사시하겠다, 공무원시험을 보겠다, 유학 간다고 해서 뒷바라지하다 보니, 정원이 딸린 전원주택은 꿈이 되어 버렸다. 자식 소용없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산다.
“언니들, 맞고 어떻게 살아. 난 안 살면 안 살았지, 그렇게는 못 살아”라며 가장 피부가 곱고 그나마 탱탱하게 유지하고 있는 강단아 할머니가 이야기한다. 올해 60세가 된 할머니로 일찍 남편을 여의고 자식 없이 혼자 살아온 할머니이다. 나름 자기 몸이나 얼굴에 관심이 많고 옷에도 관심이 많다. 소문에 의하면 남편이 물려준 재산이 많아 직장을 다닐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한 번 재혼 할 뻔했는데, 알고 보니 상대남이 유부남이라서 그 이후로는 재혼 생각은 안 하고 산다. 뭐래도 자기 자신이 가장 좋은 팔자라고 생각하며, 아침, 저녁으로 만 보 걷기를 꼭 한다. 몸이 자산이라면서, 언니들에게도 자주 운동하라고, 피부마사지 좀 받으라고 충고하며 산다.
넷 중에 가장 조용한 사람이 장 복녀 할머니이다. 올해 63세. 직장인 엄마로 살다가 3년 전에 정년으로 퇴임하고 이젠 뭔가 배우려고 이것저것 알아보고 다니고 있다. 사내아이 1명 키우면서 직장생활 하다 보니 다른 취미활동을 하지 못해서 뭔가를 배우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지금은 해외 유학하러 간 아들 한 명이 그곳에서 정착해서 현지인과 결혼하는 바람에 어쩌다 일이 있으면 가끔 보는 것 이외에는 크게 걱정할 일이 없는 분이다.
“뭐, 살다 보면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뭐. 그런데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싸우면 안 되겠더라고요. 우리 아들도 가끔 아빠랑 싸우는 엄마 모습이 기억이 난다고 말할 때, 후회되더라고요. 요즘 살기가 너무 힘들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안쓰럽기도 해요.”
장복녀 할머니 말에 다들 머리를 끄덕인다.
“참 그 소식 들었어. 아파트 후문 쪽에 생겼던 도예 공방이 문을 닫는 다네. 주인이 가게를 정리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사업을 할 생각이래. 나 어제 가서 식탁 위에 놓을 화병 하나 오천 원에 샀어. 지난번에는 만 팔천 원 달라고 했는데…….” 하면서 순애 할머니는 횡재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한다.
“요즘 살기 힘들긴 힘든가 봐. 가게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네. 그러고 보니 신기해. 카페는 자꾸 생기네. 이 동네에 카페 하나 생기더니 어느새 3개나 생겼어. 장사 안될 줄 알았는데, 망하지 않는 것 보면 이상해. 커피 한잔 아끼면 두부, 콩나물이 반찬이 생기는데, 요즘 젊은것들은 그런데 아끼지 않는 것 같아.”
노영심 할머니는 카페에 가는 젊은이나 엄마들이 못마땅하듯이 이야기를 한다.
“참, 요기 미용실 맞은편 채소 가게에서 매실액을 싸게 판대. 채소 가게 사장 아는 사람인데, 작년에 전남 구례 쪽으로 귀향해서 매실 농사를 짓고, 거기서 나온 매실로 직접 담궈 그런지 먹어보니 괜찮더라고. 생각 있으면 말해. 내가 대신 사 놓을게.”
순애 할머니는 도자기 정보에 이어 매실액 정보까지 제공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운 눈길이다. “언니, 그럼 나 한 병 부탁해.”
단아 할머니가 바로 주문한다.
“그래. 그럼 나도 거의 떨어져 가는데, 나도 부탁해.” 영심 할머니도 가세 한다.
영심 할머니는 매실액 이야기하다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 참 우리 딸애가 길에서 넘어져 오른쪽 팔뼈가 골절되는 바람에 손녀딸이 우리 집에 와있어. 좀 봐달라고 해서. 어제부터 봐주고 있는데 장가 안 간 아들한테 맡기기가 불안해서 얼른 가봐야지.” 하고 일어선다.
“언니 힘들겠다. 애 보기가 수월하지 않을 텐데. 어디 맡길 데가 있으면 좋을 텐데. 잠깐이라도 말이야.” 단아 할머니가 자기 일인 양 안타까워 한다.
“한 달 정도 치료받아야 하는 거라서, 어디 보내기도 그렇고, 내가 끼고 있어야지 뭐. 그런데 아이가 심심해해서 어디로든지 데리고 나가야 할 것 같아. 다들 또 봐.”
영심 할머니 말에 다들 일어서는 분위기다.
그때, “근데, 언니들, 다음 주면 봄꽃이 한창 핀다고 하던데, 우리 저쪽 안산자락길 같이 한 번 갈래요. 벤치에 앉아 청승스럽게 이야기만 하지 말구요. 어때요?”
단아 할머니가 제안을 한다. 다들 좋아하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