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읽은 책은 어디로 갈까

물감을 쏟아놓은 팔라완의 석양 ; palawan, 2018

by S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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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읽은 책은 어디로 갈까


예전엔 여행을 떠나서까지 책을 읽는 사람들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여행 가서 보고 먹고 마시고 경험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집에서도 볼 수 있는 책을 여행지까지 와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문득 평소에 나는 언제 책을 읽는가 생각해 보았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잠들기 전까지 잠깐의 여유가 찾아온다. 씻고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읽으려 했던 책을 펼쳐본다. 하루 종일 수많은 기호와 활자 속에서 허우적댔는지 글자들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나의 손 끝에 들려 있는 것은 책이 아닌 휴대폰이다. 책은 침대 옆에 놓인다. 이 책이 침대 옆자리의 주인이 된지는 벌써 한 달 째다. 휴대폰의 화면 불빛이 밤새 얼굴을 쓸다 보면 예상보다 늦게 잠이 들고 아침을 맞이하는 건 거울 속의 퀭한 내 모습이다. 그러니 여행지에 책을 들고 가는 일은 이해를 못할 일이 아니다. 일상에서의 책은 노력하지 않으면 읽기 힘든 부담이며 숙제이며 정복해야 할 대상이니까.


여행지에 책을 가져가 보기 시작했다. 읽고 싶어 사놨던 책들, 먼지만 쌓아두기엔 아까우니까. 숙소의 풀장에서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느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잘 읽히다니. 조금 재미가 없다고 느꼈던 책도, 평소엔 어려워서 몇 페이지 넘기다 덮어뒀던 책도 술술 잘 읽혔다. 뭐랄까, 활자가 글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 이미지가 되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달까. 그제야 사람들이 여행지에 책을 들고 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상에선 마음의 여유가 허락하지 않는 한 책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이다. 여행지의 평화로움은 내가 책을 읽든 무엇을 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고, 낯선 풍경들은 이 책 한 권에 완전히 빠져들 수 있도록 갖은 잡념을 차단시켜준다. 이것이 여행지에서 책을 읽는 이유구나.


팔라완에선 네 권의 책을 읽었다. 선선한 바람, 조용한 파도 소리, 적당한 포만감이 나를 순식간에 책 속 깊은 곳으로 잡아당겼다. 정말 빠른 속도로 읽혔지만 시간은 멈춘 듯했다. 그러다 올려다본 팔라완의 하늘은 시시각각 아름다운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팔라완은 믿기 힘든 석양을 가진 섬이었다. 세상의 모든 물감을 엎지른 듯 하늘엔 온통 여러 가지 색이 뒤엉켜 있었고 지상은 붉은색으로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나 역시도 팔라완의 석양에 삼켜져 붉은색으로 물들어 이 섬의 일부가 되었다.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사라져 가는 석양 너머에선 아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심도, 걱정도, 잡생각도, 조급함도, 불편함도, 다 내려놓으라고. 그저 바람이 시키는 대로, 시간이 흐르는 대로, 하늘 위의 물감이 흐르고 섞여 어두운 밤이 되는 것처럼 이 섬에 몸을 맡기라고. 집으로 돌아갈 때 한 가지 기념품만 챙겨갈 수 있다면 그 순간을 담아오고 싶었다. 마음속에 책 한 권쯤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은 있어야 하니까.


참 이상한 일이다. 일상에 돌아와 다시 펼쳐본 책은 완전히 다른 책이 되어있었다. 분명 그때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왜 그곳에서 처럼 재미있지 않지? 왜 읽히지 않는 걸까? 정말 같은 책이 맞긴 한 걸까? 팔라완에서 읽은 책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여행지에서 읽은 책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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