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그래프 카페 ; chiang mai, 2017
비 오는 날의 냄새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예지력이라도 있는지 코를 킁킁 대며 '오늘은 비가 올 거야'라고 말하는 날엔 정말로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의 냄새란 무엇일까 산수 하듯 추측하던 나는 냄새를 못 맡는 아이였다. 냄새는 수학 공식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살 냄새, 빨래 냄새, 꽃 냄새, 바람의 냄새, 비 오는 날의 냄새.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어렵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내가 볼 수 없는 그 세계는 아름다운 것을 품은 세상인 듯했다. 로스팅된 지 얼마 안 된 구름이란 원두에 빗물을 부으면 똑똑 떨어지며 풍기는 빗내음을 음미하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내게 비 오는 날은 회색 빛의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리고 우울한 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치앙마이는 건조한 태양의 도시였다. 햇빛에 빳빳하게 잘 마른 태양빛이 늘 도시 전체에 보기 좋게 덮여있었다. 도시가 잔뜩 머금은 빛이 굳어있는 기분을 금세 말랑하게 해 줬기에, 가끔 내리는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는 기분은 언짢기만 했다. 무표정한 얼굴의 손님은 자신을 레인이라고 소개했다. 미스터 레인. 이 손님이 찾아오는 날에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는 늘 일방적이었으니까. 우산으로 가려도 삐져나온 어깨와 발끝을 두드리며 본인 얘기에 열을 올리는 손님이었다. 집 안에만 박혀있어도 다를 거 없이 끊임없이 창을 두드리며 말을 건넨다. '거, 얼굴 좀 봅시다!' 결국 손님의 성화에 못 이겨 우산을 챙겨 문밖을 나섰다. 실은 가고 싶은 카페가 있었다. 우울한 미스터 레인 씨가 쥐어짜는 눈물에 덩달아 우울해지는 바람에 나가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집 안에 더 박혀있다간 아무리 비틀어도 젖은 기분의 물기를 털어낼 수 없을 것 같아 가고 싶던 카페에 가기로 했다.
비가 오는 올드타운의 성벽은 평소보다 더 진한 색으로 물들고있었다. 내일이면 다시 잘 마른 태양빛으로 덮일 붉은 벽돌들은 돌이킬 수 없을 것처럼 검붉은 색이 되어갔다. 성벽 아래 쏟아지는 빗줄기가 만들어 놓은 수풀을 헤치고 나오니 GRAPH CAFE라고 쓰여있는 입간판이 보였다. 내가 가고 싶어 하던 카페의 이름이다. 작고 아담한 외관의 그래프 카페는 꼭 일본의 어느 골목에서 봤던 카페 같았다. 세 평이 채 안되어 보이는 내부에는 이미 두 팀의 손님들이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옷을 털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하기 위해 메뉴판을 살폈다. 모노크롬이라는, 숯으로 색을 낸 새까만 라떼가 눈에 띄었다. 비 오는 날의 검은 라떼, 나름 잘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아 고민 없이 그 커피를 주문했다.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고, 잔에 얼음을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리듬을 타고 흐르는 간주 한 가운데엔 아직 눈물을 그치지 않은 미스터 레인 씨의 목소리도 들렸다. 작은 오케스트라에 초청된 무명 가수의 목소리 같았다. 손님들의 시선은 무채색이 된 창밖의 무명 가수를 향해있었다. 어쩌면 나만 빼놓고 그의 목소리를 음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다림 끝에 등장한 모노크롬은 메뉴판의 사진 그대로 새까만 라떼였다. 난생 처음 보는 검은 라떼를 조심스레 혀 끝에 갖다 대었다. 동그란 고소함이 혀 끝에서 구르다 이내 달콤한 검정색을 터뜨리며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 내려갔다. 미스터 레인씨를 생각해서 우울한 맛일 줄 알았는데, 보기와 다르게 달콤한 녀석이었다. 독특한 맛이었지만 마음에 들었다. 빗소리는 토독, 토독 하는 소리만 남기며 검은 라떼와 함께 점차 줄어들었다. 검은 라떼가 담긴 컵이 바닥을 보일 때가 되자 창밖의 미스터 레인 씨는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쩐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레인 씨도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은 손님이었을텐데, 달콤했던 검은 라떼처럼. 어쩐지 박수 받지 못하고 너털 너털한 걸음으로 퇴장하는 무명 가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노랠 조금이라도 들어줄걸 그랬나. 아무렴, 찾지 않아도 다시 오는 날이 오겠지. 그때가 오면 말없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검은 라떼 한 잔과 함께.
BACKPACKMAN B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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