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스부르의 제육볶음 ; strasbourg, 2013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지?'
딱딱한 버스 좌석에 앉아 있기를 10시간째, 세 번째 휴게소에 정차하자마자 너 나할 것 없이 수풀 속으로 달려가 대자연의 번영을 위해 물을 주는 승객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10시간이 넘는 이동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깨우는구나. 그나저나 국경을 지났는지도 알 수 없는 네덜란드와 프랑스 중간쯤 되는 이곳은 어디인가. 스트라스부르에는 내일이 돼야 도착할 수 있는 것인가. 왜 기차표 예매를 잘못해서 하지 않아도 될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친구라도 있었으면 대화라도 할 텐데 내 입에선 지금쯤 똥내가 날 것 같구나.
암스테르담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버스를 타고 15시간. 한국에서 미리 예매한 탈리스 고속열차 날짜를 잘못해놓는 바람에 표가 날아가버리고 없었다. 기차표를 새로 사자니 10만 원이 훌쩍 넘어 부담이 되고, 다른 방법을 찾다가 선택하게 된 게 바로 지금 타고 있는 이 버스로 이동하기. 이동 시간이 15시간이란 건 알고 있었다지만, 하루 종일 버스 안에 갇혀있는 기분이란 상상 이상으로 고역이었다. 갖고 있는 책도 다 읽었겠다, 여행을 시작했던 인천 공항부터 어제 들렀던 반 고흐 미술관 사진까지 적어도 열 번은 돌려 봤겠다, 휴게소에서 사 온 초콜릿과 바게트도 질릴 만큼 먹었겠다, 무언가를 하면 할수록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세상에서 제일 길고 지루한 열다섯 시간. 기대되는 건 오로지 하나였다. 스트라스부르에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
고등학교 동기 N. N은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유학을 가 열심히 공부 중이었던 친구로 이번 여행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지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다른 전공이었고 같이 보낸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아 엄청나게 친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용기 내어 연락하여 약속을 잡았다. 먼 타지에서 내가 아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위안 아닌가. 그 기대 하나가 15시간의 이동을 간신히 버티게 해 주었다. 어느덧 하늘은 새까맣게 물들어 밤 열 시가 되었고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친구 N이 보였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피곤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스트라스부르에선 3박 4일을 지냈다. 친구가 구해준 기숙사(겸 숙소)에서 머물며 그녀의 안내를 따라 스트라스부르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스트라스부르는 옆 마을 콜마흐와 함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실제 모티프가 된 곳으로 정말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온 듯한 아기자기함이 가득한 작은 마을이었다. 발걸음을 붙잡는 종소리를 따라가면 장엄한 노트르담 성당을 만날 수 있었고 노천카페에 앉아 즐기는 맥주 한잔과 초콜릿 아이스크림은 기분 위에 달콤한 시럽을 끼얹었다. 여행을 이렇게 편하고 즐겁게 다닐 수 있다니, 그동안 긴장과 두려움으로 똘똘 뭉쳐 굳어버린 몸뚱이를 끌고 다니던 내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연락이 두절되었던 N과는 고등학교 3년 동안 나눈 얘기보다 훨씬 많은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내가 몰랐던 N을 많이 알게 되었고 N 역시 잘 몰랐던 나를 알게 되는, 다시 친구가 되는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이틀째 오후, N이 맛있는 걸 만들어주겠다며 물었다. 캐리어 구석에 넣어놓고 여태껏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그것이 생각났다. 엄마가 정성스레 만들어준 소고기 볶음 고추장. 드디어 이 녀석을 쓸 때가 왔구나. 커다란 통에 들어있는 새빨간 고추장을 보며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욘석으로 무엇을 해 먹으면 좋을꼬. 고추장 떡볶이, 고추장찌개, 고추장 비빔밥.... 고향을 부르는 매콤하고 알싸한 붉은색 음식들을 떠올리니 입 안에 침이 돌기 시작했다.
"제육볶음!"
입 안에 고인 침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흰쌀밥 위에 양념이 골고루 잘 배인 제육볶음을 올려 입 안으로 쏘옥. 참을 수 없는 매콤 달콤한 그리운 그 맛. 더 이상의 고민은 의미가 없어. 당장 장을 봐 와 요리를 시작했다.
완성된 제육볶음은 광택제를 발라놓은 구두처럼 보기 좋게 반지르르한 빛이 났다. 얼마 만에 먹는 따뜻한 한국 밥이란 말인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양념이 잘 밴 고기 한 점을 들어 첫맛을 보았다.
"맛이 어때?"
맛을 내 글로 표현하는 건 제육볶음에겐 정말 억울한 일이다. 이 장면이 만약 영화였다면 만화 『요리왕 비룡』에서처럼 미미(美味)라는 글자를 대문짝만 하게 띄워놓고 우주 속에서 돼지고기와 내가 왈츠를 추다가 고추장이 합쳐져 제육볶음이 되어 폭발하는 그림이 될 텐데. 이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제육볶음이다.
"와...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너무 맛있다."
"너희 어머님 고추장이 다 했지, 뭐."
셰프는 겸손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제육볶음은 고추장만으로 나올 수 없는 스트라스부르 유학 생활의 바이브가 느껴지는 맛이란 걸. 커다란 냄비의 제육볶음 안에는 엄마의 사랑과 친구의 배려, 그리고 내 고향의 그리움까지 듬뿍 담겨있었다. 이 냄비 하나면 남은 여행도 충분히 버텨낼 수 있으리. 후식은 미리 사놓은 멜론과 와인이었다. 기숙사 창 밖은 어느덧 해가 져 새벽 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기분 좋은 포만감과 취기는 더할 나위 없는 세상으로 나를 인도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이 순간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언제까지나 10대일 것 같았던 N과도 어느덧 20대가 되어 술을 홀짝이고 있는걸. 영원하지 못할 거란 건 알지만 그래도 가능한 조금은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제육볶음 한 접시에 행복에 젖을 수 있다는 게, 영원히 쉬운 일은 아닐 거란 것을 알기에.
BACKPACKMAN B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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