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의 달빛을 두 잔에 담아 ; bangkok, 2019
내가 기억하는 방콕은 샛노란 망고, 뜨거운 태양, 눈부신 황금 사원, 어딜 가나 에어컨, 맵고 달고 짠 음식, 달콤 시원한 땡모반, 형광빛의 택시들, 화려한 네온사인이 부서지는 짜오프라야 강, 24시간 쉬지 않고 복작 반짝거리는 거리가 있는 곳이다. 네 번째로 찾은 방콕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그래서인지 별 다른 기대 없이 찾았던 것이 사실이다. 조그만 기내용 캐리어에 여름옷 몇 벌만 챙긴 것으로 말 다했지, 뭐. 제주도를 가도 이것보단 짐이 무거웠으리. 이렇게 짐이 없는 여행은 또 처음이다.
출국 당일까지 정신없는 날들이었다. 2019년이 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안 그래도 짧은 2월은 실수로 삭제된 것처럼 싹둑 잘려나가고 없었다. 방콕행 비행기를 끊었던 12월 말만 해도 대체 3월이 오기는 하는 걸까 싶었는데, 어느새 내 몸은 출국심사대 앞에 서 있다. 이번 여행은 가벼운 짐만 봐도 알 수 있듯 준비된 게 전혀 없었다. 전날 급하게 가입한 9000원짜리 여행자 보험과 환전한 60만원이 전부. 태국을 동네 마실 나가듯 떠날 수도 있구나. 어쩐지 편리함이 설렘을 좀먹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나면서도 나이를 먹을수록 편리함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면 그것을 고르는 게 현명하게만 느껴진다. 상대적인 가치가 변한 것이겠지.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지만, 이젠 그 말에 공감하기가 싫다. 정말 영원한 것은 없는 것 같아.
6시간을 날아 도착한 방콕의 밤은 무더웠다. 길고 긴 줄 끝에 입국심사를 받고, 299바트 하는 8일짜리 유심을 구입해 갈아 끼우고, 지하로 내려와 번호표를 뽑고 택시를 타는 것까지, 6년 전엔 처음이었던 것들을 이젠 익숙하게 따른다. 여행 중엔 늘 낯섦이 주는 두려움(혹은 설렘), 그리고 편리함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게 된다. 여행 스타일로 구별하자면 전자는 모험적인 여행이, 후자는 휴양하는 여행이 아닐런지. 이번 여행은 절대적으로 후자에 가깝다. 그래선지 이후에도 낯선 상황을 불편한 불쾌함으로 받아들이는 나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숙소는 전부 호텔이었고, 이동은 부르기만 하면 코앞까지 마중 나와주는 그랩(카풀 서비스), 식사도 거의 (태국의 물가에 비해) 가격대가 있는 깔끔한 식당에서만 했다. 택시는 전국 택시기사가 단합했는지 하나 같이 승차 거부에 미터를 켜지 않고 흥정을 시전 하는 바람에 되도록이면 타지 않았다. 그들의 낯선 행동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참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다 한 것 같다. 라떼를 먹고 싶어도 참고 500원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고르던 나는 온데간데 잊어버린 채.
휴양을 갈망할 정도로 일에 치여 사는 것은 아니었다. 졸업 후 일상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땅 위에 꼿꼿이 서는 연습과 같았다. 불안하고 싶지 않으면 일을 해야 했기에 휴식은 사치처럼 느껴지는, 쉬는 것보단 일이 고픈 시기였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날 옥죄고 있던 것일까. 방콕에서의 시간은 그저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했다. 그냥 이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싶은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유유히 헤엄치고, 그림을 그리고, 거리를 걷고,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 밤을 보내고. 오천 원짜리 위스키에 굳어있던 걱정들을 부드럽게 녹여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하면 시샘을 더 살 수 있으려나. 겨우 오천원, 위스키 치고는 헐값처럼 느껴지는 쌩쏨 sangsom이라는 술과 함께했던 밤처럼 말이다.
한 잔, 이국 땅에서의 낯선 첫 잔은 술이라기보단 설렘에 가까웠다. 낯섦이 주는 두려움을 이제는 피하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술은 예외다. 조그만 얼음덩어리들에 희석시킨 황금빛 설렘은 조심스레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심장을 따뜻하게 적셨다.
두 잔, 기분 좋은 나른함이 입꼬리 사이로 새어 나온다. 굳어있던 근육들이 부드럽게 말랑해지며 앉아있던 자세가 조금 흐트러진다. 아니, 흐트러져도 될 것 같아진다. 입 안 가득 기분 좋은 잔향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돈다.
세 잔, 조금은 붉어진 얼굴과 어쩐지 조금은 촉촉해진 눈동자. 창 밖 방콕의 야경은 이 순간 어떤 고백을 하든 면죄부가 되어줄 것만 같다. 조심스레 손 끝으로 점자를 읽어가듯 여기저기로 시선을 더듬으며 서툰 진심을 술상 위로 꺼내어 본다.
마지막 잔, 얼마 남지 않은 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가본다. 왠지 안 하던 짓을 해보고 싶어 지는 이 순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위스키 한 잔에 담배 한 모금, 그리고 눈 앞엔 열기가 식지 않은 방콕의 야경이. 이곳에 오면서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가. 낯선 선택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영원한 것은 없는 것 같다고. 취소. 낯선 이 순간이 미치도록 좋다. 그리고 이 순간은 기억 속에 영원할 것 같다.
귀국 후 알게 된 사실, 쌩쏨은 태국어로 달빛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밤, 방콕에서 기울인 건 두 잔의 달빛이었구나. 기대 없이 시작한 여행은 가슴에 커다란 달 하나를 띄웠다. 예측할 수 없음은 큰 두려움이지만 때로 이렇게 큰 선물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계속 여행을 하는가 보다. 불안한 그늘 위에 달빛 한 조각이나마 새겨두러.
BACKPACKMAN B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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