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흔적이 남아있는 레지던스 수영장 ; chiang mai, 2017
내 이름엔 물이 들어있다. 그래서인지 산보단 바다가, 운동장보단 수영장이 좋다. 다닌 여행지만 해도 강이나 호수,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이 많다.
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나는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물속에 누워 동동 떠 있으면 나만의 공간에 홀로 놓인 기분이 든다. 눈 앞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광활한 하늘이 펼쳐져 있고 물속의 고막은 적막한 우주 속을 유영한다. 눈을 감으면 온 세상에 나의 숨소리만이 들린다. 완전한 내 세상이 되는 순간이다.
수영을 시작한 건 8살 때부터다. 어렸을 적 잠깐 배웠던 수영은 지금도 몸이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물이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물이 있는 곳이라면 몸이 자석처럼 끌려가 기어코 물속에 빠진다. 수영이란, 처음엔 차갑지만 익숙해지면 점점 나와 온도를 맞춰가는 게 꼭 사람과의 관계 같기도 하다. 그래서 언제인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던 것 같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수영 같다면 참 좋을 텐데.
수영이란 단순히 물속을 헤엄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수영은 저항력이 생길 수밖에 없는 물질 속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행위다.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에 뛰어들겠다는 건 물이 그만큼 매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그 매력에 자석처럼 끌려 스스로 몸을 던지는 내가 있지 않던가. 그러나 사람을 만날 땐 그게 쉽지 않다. 물과 같이 매력적인 사람을 만난다 해도 나는 나를 쉽게 던지지 못한다. 처음엔 차가워도 이내 나의 체온과 맞춰갈지도 모르는 일인데, 팔다리를 허우적대다가도 흐름에 몸을 맡길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 차가움이, 그 저항력이 너무나 두려운가 보다.
치앙마이에서 숙소를 고르며 세운 세 가지 기준이 있다. 첫 째, 운동할 수 있는 짐이 있을 것. 둘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책상이 있을 것. 셋째, 하늘을 볼 수 있는 수영장이 있을 것. 특히 마지막 세 번째, 수영장은 내가 치앙마이에 온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매일 아침 파란 하늘을 보며 유유자적 물속을 헤엄친다. 배가 고파지면 미리 가져온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썬베드에 누워 책을 읽는다.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그대로 그 무게에 몸을 맡긴다. 시간이 멈춘 듯 흐른다. 따가운 햇살에 눈이 떠지면 다시 찬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물과 몸의 온도가 맞춰질 즈음 다시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헤엄을 친다. 이것이 치앙마이 라이프를 떠올리면 머릿속에 가장 먼저 그려진 그림이다. 수영장은 그 어떤 다른 공간보다 중요한 로망의 실현 장소였던 셈이다.
매일 아침 수영을 할 수 있다면. 치앙마이에 오기 전 꿈꿔온 로망은 운이 좋게도 실현할 수 있었다. 내가 머문 숙소는 오층짜리 레지던스로, 옥상 위에 루프탑 풀장이 있는 곳이었다. 풀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사람이 거의 없어 매일 혼자 이용했다. 아침마다 말도 안 되는 푸른빛의 치앙마이 하늘이 날 반겨줬고, 그 아래서 유유히 헤엄치며 느끼는 기분은 그것 하나만으로 치앙마이에 온 이유를 설명하기 충분했다.
물빛은 하늘을 따라 시시각각 그 빛을 달리했다. 눈이 시리게 푸른 코발트블루부터 재즈가 어울리는 옐로 오렌지, 타는듯한 강렬한 레드, 그리고 그대로 떼어다 엽서에 인쇄하고픈 파스텔빛 핑크까지 풀장은 치앙마이의 거울이 되어 오늘의 색깔을 비췄다. 그 속을 헤엄치던 나는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풀장이 품은 색들로 물들어있었다.
수영은 하루의 시작 혹은 마무리였다. 시작과 끝엔 늘 많은 생각들이 함께한다. 설렘과 걱정, 결심과 다짐, 후회와 고뇌 같은 감정들은 나와 함께 물속을 떠다녔다. 기분 좋은 생각에 설레다가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떠올라 물속 깊이 얼굴을 쳐 박은 채 잠수하기도, 잡생각을 지워보려 쉴 새 없이 헤엄을 치기도 했다.
아마 그 풀장엔 지금도 그런 것들의 잔해랄까, 잔여물이랄까, 내가 떨어뜨려놓은 그 흔적들이 남아있을 것 같다. 가까운 사람들한테 더 잘할 것, 하고 싶은 일에 용기를 낼 것, 게으름에 경계할 것, 가족들에게 안부 연락할 것, 이 마음속의 평화를 잊지 말 것, 만남에 있어 좀 더 과감해질 것. 너무 많은 것을 남겨두고 와서일까, 지금 대부분은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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