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

영화 『수영장』의 호시하나 빌리지 ; chiang mai, 2017

by SHUN
work(호시하나빌리지).jpg

영화 『수영장』


영화 『수영장』은 치앙마이에 오기 전, 치앙마이가 배경이 된 영화를 찾아보다 알게 된 일본 영화였다. 일본의 영화감독 오오모리 미카의 작품으로, 치앙마이 특유의 여유로움과 잔잔한 분위기를 잘 담아낸 슬로 무비였다. 영문도 모른 채 치앙마이로 훌쩍 떠나버린 엄마를 찾기 위해 엄마가 일을 하는 치앙마이의 게스트 하우스까지 찾아온 딸의 이야기가 큰 플롯이지만, 사실 그들의 이야기가 전혀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장면들이 이어지는 참 느리고 답답한 영화다. 게스트 하우스의 반짝이는 푸른 수영장이 영상 안에 아름답게 연출되었지만 답답한 걸 못 참는 사람들에겐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느린 호흡을 좋아하는 나도 살짝 지루할 뻔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불호인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이 생각 하나는 반드시 떠오를 것 같았다.


'저곳에 가고 싶다!'




그곳, 호시하나 빌리지


애초에 계획을 하고 찾은 곳은 아니었다. 영화 속의 게스트 하우스가 실제로 운영 중인 곳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앙마이 한 달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영화 속의 그곳, '호시하나 빌리지'가 실제로 운영 중인 게스트 하우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별한 기대 없이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1인실 방 딱 하나가 비어있었다. 생각보다 가격도 저렴했고, 위치 또한 치앙마이 시내에서 택시를 타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날짜 역시 기가 막히게 치앙마이를 떠나기 전날인 하루가 비어있었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별 고민 없이 호시하나 빌리지에 1박을 결제했다. 치앙마이의 마지막 하루는 특별하게 영화 속의 장소에서 마무리하는 거야, 라는 부푼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치앙마이 시내에서 호시하나 빌리지 까지는 그랩(우버와 비슷한 카풀 서비스)으로 30분 정도 걸렸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자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가 나왔고, 구석구석 숨겨진 골목과 자갈밭길을 지나 호시하나 빌리지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큰 부지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였다. 영화에서 보여준 것보다 더 많은 객실이 있었고, 새로 공사 중인 방도 있었다. 공사 소리 때문에 간혹 소음이 들리기도 했지만, 공사 소리가 멈추면 들리는 거라곤 바람과 새 울음소리뿐이었다. 숲 속처럼 조성된 길을 지나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니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라탄으로 엮은 의자가 놓여있는 예쁜 리셉션이 보였다. 리셉션 안쪽에 위치한 문을 두드리니 하얀 원피스를 입은 선한 인상의 여성분이 반기며 인사했다. 혹시나 싶어 일본어로 인사를 건네보았더니 내게 일본인이냐며 매우 반가워하셨다. 역시 일본분이 맞았다. 호시하나 빌리지는 일본인이 운영 중인 게스트 하우스였다. 나는 한국인이라 소개하며, 영화를 보고 꼭 와보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주인분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그러냐며, 영화 같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내가 묵을 방 키를 건네주었다. 내가 묵는 방의 이름은 '라임(LIME)'으로 키링에는 라임의 이니셜 'L'이 적혀있었다. 방에 짐을 풀자마자 바로 수영장으로 달려가 보았다. 역시, 수영장은 영화 속의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


햇살이 아름답게 내리쬐는 수영장이었다. 누구 하나 손대지 않은 물 위로 바람이 쓸고 간 잔잔한 파동이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린 물빛에 풍덩 빠져 하염없이 헤엄을 쳤다. 그러다 바라본 넓은 하늘이 온통 내 것처럼 느껴져 부자가 된 것 같아 신이 났다. 수영에 지치면 썬배드에 누워 책을 읽었다. 그럼 쿠키 앤 크림 같이 생긴 고양이가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았다. 나뭇잎은 바람의 흐름에 맞춰 함께 살랑춤을 추고 나른해진 내 기분은 시키지도 않은 콧노래를 불렀다. 밤이 되자 수영장위로 잔잔한 조명이 흔들렸고, 수영장을 바라보며 태국식 카레에 재운 닭고기 요리를 먹으며 모히또 한잔을 마셨다. 그러자 이번엔 피넛버터같이 생긴 다른 고양이가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식사 중인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어두워진 숲 속 사이사이로 찌르르르 벌레소리가 울려 퍼졌다. 식사 후 방에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따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알코올에 살짝 취할 때 즈음 바깥에서 후드득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미친 듯이 폭우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폭우 소리가 숙소를 둘러싸고 하염없이 쏟아졌고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모든 게 자연스레 흘러가는 순간들이었다. 놓인 것은 놓인 대로,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느린 시선과 호흡으로 숨을 쉬고 있으니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특별했다. 오늘의 하늘이 얼마나 넓고 푸른지를, 꽃을 바라보며 이 존재가 지닌 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무릎 위에 앉은 고양이가 얼마나 따듯한 온도를 지녔는지를, 적막한 밤을 토닥이는 자연의 빗소리가 얼마나 다정한지를 깨달았다.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무언가를 하지 않음이 특별했다.


커다란 짐가방을 싣고 낑낑대며 도착한 이곳에서 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누린다'는 생각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이리도 값비싸다니.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5분 만에 이 여유를 잃을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수영장』같은 영화가 있구나 싶었다. 놓인 것은 놓인 대로,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이렇게 사는 일상은 오직 영화 속뿐이려나.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영화 속의 그곳에라도 이 여유를 두고 올 수 있음이.


icon(호시하나).jpg

instagram@bpmbear
http://instagram.com/bpmbear

keyword
이전 02화낯설지만 익숙한 것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