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해보는 디지털 디톡스 호캉스 후기
지난 주말, 휴대폰을 꺼둔 채 호캉스를 다녀왔다. 잊고 있던 올해 계획인 '한 달에 한 번, 디지털 디톡스 호캉스'가 1월이 거의 끝날 시기에 떠오른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인데 벌써 1월 28일이라니, 이대론 안 돼. 다음날인 1월 29일 일요일, 명동의 로얄 호텔에서 혼자 하루를 머무르게 된 배경이다.
룰은 하나였다. 집을 나설 때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비행기 모드를 풀 수 있는 건 무조건 체크아웃을 한 이후여야 한다. 집에 휴대폰을 두고 나오는 방법도 있지만 다음날 바로 휴대폰을 사용해야 해서 비행기 모드가 최선이었다. 대신 룰을 어기면 호캉스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페널티를 만들었다.
호텔까지 찾아가는 길과 호텔 근처의 가고 싶은 카페, 식당 등은 미리 캡처하여 앨범에 저장해 두었다. 1박 2일의 간단한 짐을 꾸린 채 현관 앞에 서서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눌렀다. 꼭 내가 알던 세상에서 로그아웃하는 기분이었다.
로얄 호텔까지 찾아가는 길은 쉬웠다. 요즘 일하는 사무실 근처인 데다 명동 성당 바로 앞이었다. 굳이 지도를 저장해오지 않아도 될 뻔했다. 다만 머릿속에 자꾸 볼 빨간 사춘기 '여행'의 노랫말이 안지영 씨 모창으로 맴돌았다.
'좌 오늘 떠나요, 공항으뤄. 핸드폰 꺼놔욥. 제발 놜 찾질 말아쥬어.'
휴대폰 없이 지도 보며 호텔을 찾아가는 길이 제법 여행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체크인을 마친 뒤 객실에 들어서자 가뿐함보단 피곤함이 밀려왔다. 아침 일찍 한 시간 동안 트레드밀 위를 달린 탓도 있겠지만 그보단 이 특별한 이벤트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급하게 예약한 가장 저렴한(당일 현장에서 객실 지정해 주는), 창밖으로는 벽뷰가 펼쳐진 객실. 이런 거라면 굳이 호텔일 필요가 있었나 싶어졌다. 집에서 비행기 모드 버튼만 누르고 있어도 됐었잖아.
일단 침대에 누워 숨을 돌리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그 상태로 자연스레 인스타그램에 접속했겠지만, 체크인하자마자 체크아웃을 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 감옥을 만든 건 아닐까 싶은 페널티를 되새기며 호텔 밖을 나섰다.
휴대폰이 없는 하루는 생각보다 더 불편했다. 그리고 지루했다. 불편함과 지루함을 오프라인의 것들로 꽉꽉 채우려고 노력했다. 아니, 사실 노력이라기보단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의 도파민을 대신해 오프라인의 도파민으로 충족시키려는 본능이랄까. 이를테면 독서, 글쓰기, 걷기가 그런 것이었다. 집중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니 지루함은 가라앉았고, 걷다 보니 불편함은 새로운 발견에 꼭 필요한 감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디지털 디톡스 호캉스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더 확실해졌다. 같은 결과도 더 훌륭하게 느껴졌달까. 그날 먹은 커피와 치즈테린느의 맛은 꽤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조만간 또 갈 생각.) 마침내 밤이 되었을 땐 오늘 하루가 '굳이'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집에서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누르는 정도로는 오늘의 감상을 느낄 수 없었음이 분명해졌다. 단연 확정이었다, 2월의 호캉스도.
디지털 디톡스를 계획한 이유는 하나, 더 이상 멍청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이용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반대의 경우였던 것 같다. 카톡에 뜨는 ‘1’과 같은 숫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 하루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속 망망대해를 헤매는 밤으로 끝나곤 했다. 영상 하나만 클릭했을 뿐인데 새로고침 할 때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새로운 영상들로 넘실댄다. 어째 가끔은 나보다 더 나 같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알게 된 것이다. 언젠가는 얘가 나를 집어삼키겠구나. 진짜 나보다 더 나 같은 내가 되겠구나.
AI를 다룬 SF영화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의 현실은 벌써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1'을 지우기 위해 들어간 카톡창에 뜬 신발 광고를 보고는 사이즈를 검색해 본다. 사이즈가 없어 다른 사이트들도 전부 뒤져보다 결국 포기하고 숨을 돌릴 겸 인스타에 접속한다. 스토리와 게시글에 도배된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과 온갖 콘텐츠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다. 그것도 질리면 '릴스'나 '숏츠'같은 짧은 영상들을 보기 시작한다. 어느새 밤이 되어있다. 카톡의 '1'을 확인하려고 했을 뿐인데 하루가 갔다. 내 의지대로 선택한 것은 카톡의 '1'확인하기 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알고리즘대로 흘러갔다. 정말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걸까.
현대인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 중 하나는 권태라고 한다. 거의 모든 일을 기계가 대체할 수 있게 되어가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희박해져 심심해 죽겠다는 것이다. 휴대폰 사용은 권태를 이기는 가장 쉽고 빠른 해결책이다. 겨우 손바닥 안에서 이토록 쉽게 자극을 해결해 주는 무언가가 또 있었던가. 순간적이라 그만큼 쉽게 휘발된다. 체화되지 않은, AI가 추천해 주는 것을 먹고 쓰고 마시고 바르고 있으니 나 스스로 사고하기도 점점 힘들어진다.
휴대폰 이전엔 TV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서인지 TV에 '바보상자' 같은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멍하니 앉아 바보처럼 몇 시간이고 방영되는 영상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도 다를 게 뭔가. 폰 화면 속 클릭 한 번이면 내가 원하는 것들이 자동으로 추천된다. 한 번으로 시작한 클릭은 끝이 없는 파도를 탄다. 그럼에도 휴대폰엔 바보상자와 같은 별명이 없다. 진짜 바보는 상자가 아닌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호캉스의 그날 밤, 혹시 누군가 급하게 나를 찾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하마터면 비행기 모드 버튼을 끌 뻔했다. 평소에 하지도 않던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어찌나 불안해했는지. 다음날 체크아웃을 마치고 비행기 모드를 푸니 아니나 다를까, 놀랍도록 나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섭섭함보다 후련함이 더 컸다. 하루 정도 휴대폰을 끄고 산다고 큰일이 나지 않는구나.
오늘도 디지털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는 나에게 디지털 디톡스 호캉스 데이가 시사하는 바는 컸다. 2월의 호캉스 전에는 스마트폰을 더 스마트하게 쓰는 내가 되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