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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독점 향신료 무역

향신료 무역이 만든 최초의 다국적 기업과 그 몰락

by 이지현

향신료는 세계사를 변화시킨 가장 강력한 경제적, 문화적 동력 중 하나이다. 그 중심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가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암스테르담의 작은 항구에서 1602년에 설립된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자 주식회사였다. 국가로부터 전쟁 수행, 조약 체결, 요새 건설, 식민지 통치와 같은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아 '국가 안의 국가'로 기능했으며, 특히 아시아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여 17세기에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회사는 2,000여 척의 함선, 5만 명이 넘는 직원, 그리고 현대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8조원에 달하는 자본금을 보유한 거대 기업이었다. 하지만 VOC의 진정한 힘은 단순한 규모가 아니라, 자신들의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에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완벽한 독점


VOC의 가장 큰 힘은 '주식회사'라는 혁신적인 시스템에서 나왔다. 이전까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탐험이 왕실의 막대한 재정에 의존했던 것과 달리, VOC는 세계 최초로 일반 대중에게 주식을 공개적으로 판매했다.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인은 물론, 하녀나 장인까지도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VOC의 주식을 샀다. 이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자본을 끌어모으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모인 자본은 경쟁자였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10배를 훌쩍 넘었다.

17세기 바다를 지배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함선들. 이들은 무역선이자 동시에 강력한 군함이었다.

막대한 자본으로 VOC는 강력한 함대를 구축했고, 향신료의 세계 유일 산지인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를 지배하던 포르투갈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군사적으로 완벽히 장악했다.

VOC의 전략 핵심은 '희소성의 공학(Engineering of Scarcity)'이었다. 고부가가치 향신료인 정향과 육두구의 생산과 유통을 완벽하게 독점하기 위해,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체계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독점 계약 강요: 현지 술탄들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오직 VOC에만 향신료를 팔겠다는 불평등한 독점 계약을 강요했다.
반다 학살 (1621): 계약을 어기고 영국 상인에게 몰래 육두구를 팔았다는 이유로, 반다 제도의 원주민 15,000명 중 1,000명도 채 남지 않을 때까지 학살했다. 그리고 텅 비어버린 섬은 네덜란드인 농장주와 아시아 각지에서 끌고 온 노예들로 채워졌다.
멸종 정책 (Extirpation):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하기 위해, 본사가 지정한 몇몇 섬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향신료 나무를 문자 그대로 '멸종'시켰다. 병사들은 정기적으로 섬들을 순찰하며 야생에서 자라는 어린 묘목 하나까지 모조리 불태우거나 베어버렸다.

이토록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 이유는 단 하나, 향신료가 당시 유럽인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육두구 500g은 런던 시내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과 맞먹었고, 후추 한 자루는 한 사람의 평생 임금에 해당했다.

향신료는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이기 이전에,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최고의 사치품이자, 부패를 막는 방부제이며, 심지어 페스트를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조작된 희소성 덕분에, VOC는 인도네시아에서 헐값에 사들인 향신료를 유럽 시장에 무려 17배가 넘는 가격으로 팔아치우며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다.


구조의 균열, 내부에서 시작된 붕괴


영원할 것 같았던 VOC의 황금 제국은, 그러나 외부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내부에서부터 심각한 균열음을 내며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본사로부터 배로 1년이나 떨어진 아시아 현지 직원들에게 암스테르담의 감시는 닿지 않았다. 그들은 회사의 공식 무역망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사적인 밀무역과 횡령을 저지르는 것이 일상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으로 가는 회사의 배에 개인적으로 사들인 직물을 몰래 싣고 가 현지에서 비싸게 팔아치운 뒤, 그 돈으로 금이나 구리를 사서 다시 밀수하는 식이었다. 이는 일부 직원의 일탈이 아니라, 회사 전체에 만연한 구조적 문제이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직원들은 공식적인 급여보다 이런 불법적인 부수입으로 부를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었고, 이는 회사의 효율성과 이익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암세포가 되었다.

회사의 회계 시스템은 의도적으로 불투명하게 설계되었다. 아시아 각지의 상관에서 보내오는 장부는 신뢰할 수 없었다. 현지 지점장들은 손실을 숨기거나 자신들의 사적인 거래를 감추기 위해 장부를 조작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일본 나가사키 상관의 경우, 실제로는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부 조작을 통해 수십 년간 흑자를 내는 것처럼 본사를 속이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18세기 후반, 회사의 실제 이익이 줄어들자 주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빚을 내어 배당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익이 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분식회계는 결국 부채의 악순환과 자본 잠식으로 이어졌다. 화려한 성공 신화 뒤에 가려진 이 심각한 재정 부실은 결국 1799년, 회사가 파산하고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국유화되는 비극적 결말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7세기의 성공 방정식은 18세기의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오히려 족쇄가 되었다. VOC는 고부가가치 향신료 독점이라는 성공 모델에 너무 깊이 취해 있었다. 향신료 외에 차, 직물, 아편 등 새로운 상품이 아시아 무역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변화에 둔감했다.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기보다 과거의 영광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던 것이다. 독점 유지를 위한 막대한 군사비, 내부를 좀먹는 부패, 심각한 재정 부실은 VOC를 스스로 탈출할 수 없는 '금박을 입힌 새장' 속에 완벽하게 가두어 버렸다.


깨어진 독점, 식물학자의 활약

네덜란드의 철옹성 같던 독점 체제에 가장 극적인 균열을 낸 것은 거대한 함대가 아닌, 집념에 불타는 한 명의 식물학자였다. 프랑스의 행정가이자 모험가였던 피에르 푸아브르(Pierre Poivre). 그는 부의 진정한 원천이 향신료를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그 식물 자체를 손에 넣어 재배를 통제하는 데 있음을 간파했다.

유럽 제국들의 운명을 바꾼 육두구. 네덜란드는 이 씨앗의 발아를 막기 위해 뜨거운 석회에 절이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네덜란드는 육두구 씨앗의 발아를 막기 위해 뜨거운 석회 용액에 담갔다 빼는 등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푸아브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770년, 목숨을 건 비밀 작전을 감행했다. 네덜란드 순찰 함대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어둠을 틈타 작은 배로 말루쿠 제도의 외딴 섬에 잠입했다. 그는 매수해 둔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아직 석회 처리를 거치지 않은 싱싱한 육두구 열매와 정향 묘목을 빼돌리는 데 극적으로 성공했다.

그가 훔쳐낸 묘목들은 프랑스령 식민지의 식물원에 안전하게 옮겨 심어졌다. 그의 성공은 네덜란드 독점의 종말을 알리는 요란한 신호탄이었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영국,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도 향신료 재배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시장에 풀리는 공급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결과는 향신료 가격의 대폭락이었다. 18세기 초 1파운드에 80실링이 넘던 육두구 가격은 세기말에 이르러 20실링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한때 왕족과 대귀족의 부를 상징하던 전유물은, 이제 부유한 시민 계급이라면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상용품으로 전락했다. 인위적인 희소성에 기반을 둔 VOC의 사업 모델이 근본부터 무너져 내린 것이다.


변방에서의 패배, 신화가 깨지다

VOC의 쇠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적인 사건은 향료 제도가 아닌 먼 곳, 인도 남서부 말라바르 해안의 육지에서 일어났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여러 소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지역을 통합하며 마르탄다 바르마 왕이 이끄는 트라방코르 왕국이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팽창 정책은 이 지역의 후추 무역을 독점하려던 네덜란드의 이익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독점권을 강제하기 위해 1741년, 유럽에서 파견된 정예군을 이끌고 트라방코르를 침공했다.

전쟁의 분수령은 콜라첼 전투(Battle of Colachel)였다. 모두가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네덜란드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유럽 전체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트라방코르 군대는 이 지역의 지리와 기후에 익숙한 지역 어민들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아 네덜란드군을 해안가에 포위했다. 그리고 전투 중, 트라방코르 군이 쏜 포탄 한 발이 우연히 네덜란드군의 화약고에 명중하면서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콜라첼 전투. 이 패배는 유럽의 군사적 우월성이라는 신화를 깨뜨린 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식량과 탄약을 모두 잃은 네덜란드군은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이 전투는 아시아의 토착 왕국이 유럽의 정규 식민 군대를 상대로 거둔 최초의 주요한 군사적 승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유럽의 군사적 우월성이라는 신화에 처음으로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전투의 후폭풍이었다. 포로로 잡힌 네덜란드군 총사령관 유스타키우스 드 라노이는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대가로 트라방코르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는 이후 수십 년간 자신의 모든 군사 지식과 기술을 동원해 트라방코르 군대를 유럽식으로 훈련시키고, 현대적인 포병 부대를 창설하며, 견고한 요새를 설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는 자신들을 패배시킨 세력을 스스로 강화시켜준 셈이 되었다. 콜라첼에서의 패배는, 이제 더 이상 강력한 해군력만으로 현지 정치를 좌우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분명한 신호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역사는 한 시대의 향기를 인류의 탐욕이 어떻게 독점하고 속박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기록이다. 그들은 부와 권력의 원천인 육두구와 정향에 값을 매기고, 총칼로 그 향기가 태어나는 땅을 봉쇄하여 아무나 넘볼 수 없는 '그들만의 것'으로 삼으려 했다. 그렇게 향기는 피비린내 나는 감시와 학살 속에서 소수만을 위한 사치품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본디 경계를 넘어 퍼져나가는 속성을 타고난 향기를 철옹성 안에 영원히 가둘 수는 없었다. 프랑스의 식물학자 피에르 푸아브르가 목숨을 걸고 훔친 작은 묘목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받던 향기에 마침내 해방을 고하는 자유의 씨앗이었다.

그 자유의 씨앗이 머나먼 대륙에 뿌리내리자, 한때 왕족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던 비밀의 향기는 마침내 굳게 닫힌 빗장을 풀고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한때 런던의 집 한 채와 맞바꾸어야 했던 육두구 향을 만끽하고, 평생의 노역과 맞먹었던 후추의 알싸함을 평범한 식탁에서 누리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무심코 스치는 향기 한 조각에는 이처럼 한 시대를 뒤흔든 탐욕과 투쟁의 역사, 그리고 마침내 독점의 족쇄를 끊고 만인의 것이 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향기란 이렇듯 스스로의 역사를 품은 채, 시대를 넘어 우리 곁에 머무는 생명력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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