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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칼라브리아에서 쾰른까지 향의 기록

조향사의 팔레트, 베르가못과 시트러스 혁명

by 이지현

시대를 뒤흔든 한 병의 향수


향기는 보이지 않지만, 그 어떤 언어보다 선명하게 시대를 기록한다. 18세기 유럽, 동물의 체취를 농축한 무겁고 관능적인 향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던 시절, 세상의 판도를 뒤흔든 한 방울의 액체가 등장했다.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의 태양을 머금은 과일, 베르가못으로 빚어낸 '오 드 콜로뉴'였다. '쾰른의 물'이라 불린 이 투명한 향수는 어떻게 낡은 관습을 밀어내고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을까. 칼라브리아의 '녹색 황금'에서 시작해, 쾰른의 두 거인 파리나와 4711의 숙명적 대결을 거쳐, 근대적 '브랜드'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한 병의 향수가 써 내려간 위대한 역사를 따라간다.




녹색 황금, 후각의 혁명을 열다

새로운 향수의 시대를 열게 한 베르가못

18세기 유럽의 향수 지형도는 사향, 영묘향, 용연향 같은 동물성 향료가 오랫동안 장악하고 있었다. 강렬한 만큼 인위적이었고, 매혹적인 만큼 무거웠다. 바로 그 정체된 후각의 세계에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의 좁은 해안에서만 자라는 베르가못이 등장하며 거대한 균열을 냈다. '녹색 황금'이라 불릴 만큼 귀했던 이 과일은, 이 땅의 독특한 미기후 속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품질을 자랑했다. 레몬의 상큼함과 비터 오렌지의 쌉쌀한 꽃향기를 한 몸에 품은 다층적인 매력은 기존의 어떤 시트러스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단순한 상쾌함을 넘어 섬세한 꽃내음과 은은한 향신료의 기운까지 품은 베르가못은 조향사들에게 낡은 공식을 뒤엎을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는 신선한 향수라는 새로운 장르의 서막이자, 계몽주의가 추구하던 자연스러움과 명료함을 향으로 구현할 완벽한 재료의 발견이었다.


영혼을 지키는 방식, 스폰지 압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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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가못의 섬세하고 복합적인 영혼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칼라브리아의 장인들은 '스폰지 압착법(sfumatura a spugna)'이라는 고대의 방식을 고집했다. 현대의 증기 증류법이나 용매 추출법에 비하면 지극히 원시적인 기술이었다. 먼저 과일을 반으로 갈라 '레스토르토'라는 특별한 칼로 과육을 파낸 뒤, 껍질을 천연 해면 스펀지에 수없이 눌러 에센셜 오일을 흡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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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로 흥건한 스펀지는 장인의 손으로 직접 테라코타 항아리 '콘콜리나'에 짜 넣었다. 기계나 열을 일절 쓰지 않았기에 생산성은 극도로 낮았고, 장인 한 명이 온종일 매달려도 얻는 오일은 극소량에 불과했다. 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바로 이 비효율적인 정성 덕분에, 열에 스치기만 해도 변질되는 시트러스의 연약하고 휘발성 강한 최상단 향(top note)을 한 치의 손상도 없이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이 고된 노동의 산물이야말로 베르가못 오일을 보석처럼 귀하게 만든 진정한 비결이었다.


최초의 오 드 콜로뉴, 세상을 매혹하다


쾰른에서 피어난 이탈리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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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에몬테 출신의 조향사, 조반니 마리아 파리나(Giovanni Maria Farina). 훗날 독일 쾰른에서 요한 마리아 파리나(Johann Maria Farina)로 알려진 그는 이 새로운 향의 무한한 잠재력을 꿰뚫어 보고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탄생시킨 주인공이었다. 당시 유럽 무역의 중심지였던 독일 쾰른에 정착한 그는 1709년, 세계 최초의 '오 드 콜로뉴(Eau de Cologne, 쾰른의 물)'를 세상에 내놓았다. 파리나의 천재성은 혁신적인 베르가못을 축으로 레몬, 오렌지, 네롤리, 라벤더 등 지중해의 햇살을 연상시키는 식물성 오일을, 불순물이 거의 없는 순도 높은 포도 증류주와 정교하게 결합시킨 데 있었다. 조악한 증류주를 쓰던 당시 관행과 달리, 그는 깨끗한 알코올을 사용해 원료 본연의 섬세한 향이 왜곡 없이 피어나게 했다. 그 결과, 이전의 무겁고 동물적인 향과는 차원이 다른, 수정처럼 맑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듯한 활기 넘치는 향수가 탄생했다.


왕실을 사로잡은 가벼움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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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비 온 뒤 이탈리아의 봄 아침, 산골짜기 수선화와 오렌지 꽃의 향기"라고 묘사했다. 인공미보다 자연의 명료함을 중시했던 계몽주의 시대의 미학을 완벽하게 포착한 표현이었다. '오 드 콜로뉴'는 출시되자마자 유럽 전역의 왕실과 귀족 사회를 순식간에 매료시켰다. 프랑스의 루이 15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물론, 특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일년에 660병을 쓸 정도로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향수를 몸에 뿌리는 것을 넘어 손수건에 적시고, 심지어 부츠 안에까지 넣었다고 전해진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역시 충실한 고객으로서 파리나 가문을 왕실 공식 납품업체로 지정했다. 이처럼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 앞다투어 사용하면서 오 드 콜로뉴는 단순한 향수를 넘어 세련된 취향과 높은 신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숙명의 라이벌, 4711의 탄생

'기적의 물'에서 '4711'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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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나의 경이적인 성공은 수많은 모방품을 낳았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라이벌은 단연 '4711'이었다. 1799년, 쾰른의 사업가 빌헬름 뮐헨스는 한 수도사에게 결혼 선물로 받았다는 '기적의 물(aqua mirabilis)' 제조법을 기반으로 향수를 팔기 시작했다. 당시 쾰른에 흔했던 '파리나'라는 성을 교묘하게 이용해 한동안 원조 행세를 하던 그는, 결국 오랜 상표권 분쟁 끝에 법원의 판결로 그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었다. '4711'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은 이때 탄생했다. 프랑스 점령군이 쾰른의 주소 체계를 정리하며 뮐헨스의 공장에 붙여준 번호 '4711'을 그대로 브랜드명으로 삼은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번호는 브랜드에 잊을 수 없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칙령, 향수의 운명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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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1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1810년 나폴레옹의 칙령이 발표되면서 찾아왔다. 모든 내복약의 제조법 공개를 의무화한 이 칙령은, 비밀스러운 비방에 의존하던 '기적의 물' 제조업자들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마시는 용도로도 팔리던 4711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비법을 공개하고 약으로 남을 것인가, 비법을 지키고 약이기를 포기할 것인가. 뮐헨스는 후자를 택했다. 그는 제품의 용도를 '외용'으로만 한정한다고 서둘러 발표하며 위기를 돌파했다. 이 전략적 후퇴는 결과적으로 향수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다. 향수가 의약품의 영역에서 공식적으로 분리되어, 오직 후각적 즐거움을 위한 독립적인 기호품이자 화장품으로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시대의 상징이 된 향수


봉건의 향기를 넘어 부르주아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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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드 콜로뉴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적이고 유동적이며, 점차 부르주아화 되어가는 새로운 시대를 후각으로 구현한 상징물이었다. 향료를 채운 포맨더나 특정 귀족만을 위한 맞춤 향수가 개인에게 귀속되는 봉건적 특성을 가졌다면, 오 드 콜로뉴는 달랐다. 작은 병에 담겨 군인의 배낭이나 상인의 가방에 쉽게 들어갔다. 이러한 휴대성은 무역, 전쟁, 여행으로 이동이 잦아진 근대인의 삶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또한 시트러스와 허브를 알코올에 녹인 투명한 액체는 청결과 위생, 활력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연상시켰다. 이는 인구 밀집 도시에서 개인의 청결이 사회적 지위의 척도로 여겨지기 시작한 시대정신과 정확히 일치했다.


근대 향수 산업의 서막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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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상인, 의사 등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오 드 콜로뉴를 애용했다는 사실은 향수가 더 이상 소수 귀족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특히 '쾰른의 물'이라는 이름은 특정 후원자가 아닌, 상업 도시의 이름을 딴 최초의 사례였다. 이는 향수가 비밀스러운 사치품에서, 일관된 품질과 가격을 바탕으로 누구나 구매할 수 있는 '브랜드' 상품으로 전환되는 자본주의적 모델의 시작을 알렸다. 모든 병에 자신의 서명을 넣고 품질을 표준화하려 했던 파리나의 노력은 현대 브랜딩 전략의 원형이었다. 이처럼 오 드 콜로뉴는 근대적 생산, 유통, 브랜딩 개념을 향수 산업에 도입함으로써, 오늘날 거대 향수 산업의 초석을 다졌다. 그 향기만큼이나 비즈니스 모델 또한 혁명적이었던 것이다.


향기를 넘어, 불멸의 아이콘으로

오 드 콜로뉴의 탄생과 성공은 단순한 유행의 변화가 아닌, 시대적 전환의 후각적 발현이었다. 칼라브리아의 원료, 장인의 기술, 그리고 파리나의 천재성은 가볍고 명료한 자연의 향을 갈망했던 계몽주의 시대정신과 완벽하게 공명했다. 나폴레옹의 칙령은 향수를 약의 굴레에서 해방시켰고, 휴대성은 향수를 부르주아의 일상으로 파고들게 했다. 마침내 오 드 콜로뉴는 최초의 '브랜드' 향수로서 현대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오늘날 우리가 '코롱'을 상쾌한 향의 대명사로 사용하는 것, 바로 이것이 300년 전 쾰른에서 시작된 위대한 혁명이 남긴 살아있는 유산이다. 오 드 콜로뉴는 그렇게 향기를 넘어, 역사와 문화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불멸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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