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된 향기, 그러나 꺼지지 않은 불씨
조선 선비의 서재에 피어나던 고결한 향기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가 개방되면서, 한반도는 서구의 문물과 함께 다양한 향기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숯불 위에서 피어오르던 고체 향과 더불어, 알코올을 기반으로 한 투명한 액체 향수의 등장은 한반도 향 문화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는 '근대성'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문화적 확장이었으며, 수천 년간 이어져 온 한반도 향 문화가 다채롭게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향을 피우는 행위가 정신 수양의 과정이자 공간을 정화하는 의례였던 전통과 달리, 향수는 개인의 몸에 직접 뿌려 매력을 발산하는 소비재였다. 향의 의미는 정신적 가치에서 감각적 표현으로, 공동체의 의례에서 개인의 욕망으로 그 무게 중심을 옮겨갔다. 일제강점기와 급격한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전통 향은 비효율적이고 비과학적인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었고, 사람들의 일상에서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한때 국가의 질서를 상징하고 선비의 정신을 담아냈던 향의 다채로운 의미는 잊혔고, 그 자리를 편리함과 강렬함으로 무장한 화학적 향기가 차지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전통 향 문화가 어떻게 변화하고 적응해 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전통적 가치가 보존되었는지를 살펴본다.
1876년, 강화도조약과 새로운 상품의 유입
19세기 말, 조선 개항과 함께 본격화된 서양식 향수의 유입은 한반도의 향 문화에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다. 향의 물리적 형태(고체에서 액체로), 사용 방식(공간 중심에서 신체 중심으로), 그리고 근본적 의미(정신적 수양에서 외적 매력으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이 재정의되었다. 이는 단순한 상품 교체가 아닌, 문화적 세계관의 전면적 재구성을 의미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은 단순한 외교적 합의가 아닌, 조선의 정치적·경제적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동시에 문화적 식민화의 첫 단계였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과 서구 열강은 조선의 문을 강제로 열었고, 그 틈을 통해 전통 사회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질적 상품들이 물밀듯 유입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알코올을 기반으로 한 서양식 향수와 화장품의 등장이었으며, 이는 한반도의 향 문화에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다.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향의 개념은 '향나무(香木)'나 '향가루(香粉)'와 같은 고체 형태의 재료를 화로(火爐)나 향로(香爐)에서 불을 피워 연기를 통해 발산시키는 방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서구에서 유입된 향수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겨 분무기 형태로 직접 신체에 뿌리는 액체 형태였으며, 이는 전통적 향 문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감각적 경험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사용의 간편함이 두드러졌다. 복잡한 준비 과정과 불을 다루는 위험성 없이, 단순히 병을 열고 뿌리는 것만으로도 향기를 즐길 수 있었다. 또한 그 향기는 전통 향과는 달리 즉각적이고 강렬했으며, 공간이 아닌 개인의 신체에 머물러 그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는 특성을 가졌다. 이러한 사용의 편리함과 강렬한 발향력, 그리고 개인화된 경험은 전통 문화의 틀 안에서 살아온 조선인들에게 문화적 충격과 함께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왔다
신문과 잡지 같은 새로운 대중 매체는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이었다. 1920년대 경성의 신문 지면은 '오리지나루 향수', '홀리랜드 향수', '콜티 향수'와 같은 일본 및 서양 브랜드의 광고로 넘쳐났다. 『동아일보』, 『매일신보』와 같은 일간지는 물론, 『신여성』, 『별건곤』 같은 신생 잡지들은 새로운 소비문화의 전파자 역할을 했다. 이들 매체에 실린 광고와 기사는 향수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정신임을 명확히 드러냈다.
향수 광고는 '모던'하고 '하이칼라'한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서구적 외모의 단발머리 여성이 등장하여 세련된 포즈를 취하는 삽화는 독자들에게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주었다. 광고 문구는 더욱 직접적이었다. "구식 향내를 풍기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부끄러운 일"이라는 식의 메시지를 통해 전통 향을 폄하하고, "신식 향수를 사용하여 문명인이 되자"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했다. 이 광고들은 "신여성의 필수품", "사교계의 여왕이 되는 비결", "당신의 인격을 높여주는 향기"와 같은 자극적인 문구로 소비자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향수는 이제 개인의 수양이나 제례의 도구가 아닌, 타인에게 자신을 매력적으로 드러내고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기 위한 소비재가 되었다. 광고는 향기가 내면의 품격이 아닌, 외적으로 구매하고 연출할 수 있는 것임을 끊임없이 속삭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16년, 최초의 근대적 국산 화장품 브랜드인 '박가분(朴家粉)'이 등장했다. 창업주 박승직은 전통적인 분 제조 기술에 서구의 상품 개념을 결합하는 선구적인 시도를 했다. 그는 단순히 분을 만드는 것을 넘어, '브랜드'를 만들고자 했다. 세련된 국화 문양이 인쇄된 라벨과 규격화된 포장은 기존의 투박한 포장과는 차원이 다른 근대적 상품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박가분은 향을 핵심적인 차별화 요소로 삼았다. 기존의 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은은하고 세련된 향기를 첨가하여, 일본산 수입 분과 경쟁할 수 있는 고급 상품으로서의 매력을 어필했다. 이 전략은 정확히 시대의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신문 광고를 통한 적극적인 마케팅에 힘입어 박가분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곧 '박가분'이라는 상품명이 분 전체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될 정도로 신여성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박가분의 폭발적인 성공은, 향이 더 이상 전통적 맥락에 얽매이지 않고 화장품의 상품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박가분의 영광은 그 안에 숨겨진 치명적인 비밀과 함께 오래가지 못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박가분 사용자들 사이에서 피부가 검게 변하고, 신경 마비 증세를 보이거나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는 끔찍한 부작용 사례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원인은 피부를 하얗게 만드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된 주원료, 바로 백연(白鉛)이라 불리는 연백(lead carbonate), 즉 독성이 강한 납 화합물이었다. 이 사실이 의학계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박가분은 '아름다움을 파는 독'으로 낙인찍혔고, 사회는 거대한 공중 보건 스캔들에 휩싸였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 지형 속에서 전통적인 향 문화는 급격히 위축되어 주변부로 밀려났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사랑방에서 즐기던 분향묵좌(焚香默坐)의 풍류, 즉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 명상하며 자신을 성찰하던 깊이 있는 문화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 행위가 상징하던 내면적 가치와 정신적 여유는 빠르게 변화하는 근대 도시의 속도와 효율성의 논리 앞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복잡하고 섬세한 합향(合香) 기술과 다양한 향로를 감상하고 사용하는 미학적 즐거움 역시 소수의 전문가나 수집가가 아닌 이상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결국 전통 향의 명맥은 본래의 다채로운 맥락을 상실한 채, 불교 사찰의 종교 의식과 일부 종가(宗家)의 조상 제사(祭祀)라는 극히 제한적인 영역에만 갇히게 되었다.
일상적, 개인적, 미학적 차원의 풍부했던 향 문화는 대중의 삶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풍부하고 다면적인 향의 역사는 일부 종교적 관습으로 축소되는 심각한 문화적 기억상실로 이어졌다. 향이 한때 왕권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정치적 도구였으며, 백제금동대향로처럼 하나의 우주를 담아내는 철학적 상징이었고, 고려시대 향도들처럼 공동체의 구원을 염원하는 그릇이었으며, 조선 선비들에게는 학문과 수양을 완성하는 중요한 도구였다는 사실은 거의 완벽하게 잊혀 갔다. 향의 역사는 지워지고, 그 의미는 축소되었으며, 결국 향은 그저 '오래된 것'으로만 남게 되었다.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시작된 근대화의 과정은 한반도의 전통 향 문화에 깊은 단절을 가져왔다. 서양 향수가 '근대'와 '문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 동안,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 향은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며 대중의 일상에서 멀어졌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향은 개인의 수양이나 사회적 교류의 매개가 아닌, 일부 종교 의례에만 사용되는 특수한 물건이 되었다. 한때 국가의 질서를 상징하고, 선비의 정신을 담아내며, 민중의 염원을 품었던 향의 다채로운 의미는 잊혔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한반도의 향 문화는 오랜 역사가 무색할 만큼 깊은 단절과 망각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향은 마치 다 타버린 재처럼, 그 형체와 온기를 거의 잃어버린 듯 보였다. 그러나 모든 재 속에는 꺼지지 않은 불씨가 숨어 있는 법이다. 비록 대중의 일상에서는 멀어졌지만, 사찰의 법당과 종가의 사당에서는 여전히 향불이 이어지고 있었고, 소수의 장인들은 잊혀진 합향의 기술을 묵묵히 지켜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