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묠니르’와 북유럽 신화
어벤져스를 보다 보니 문뜩 이런 생각이 든다. 아니 토르는 저렇게 힘도 센 양반이 팔뚝에 비해 너무 짧은 망치를 들고 다니는 거 아닌가? 특히 꽤나 두툼해 보이는 망치 헤드에 비해 망치 손잡이는 철물점에서 파는 일반 망치 손잡이랑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망치는 대체 왜 이렇게 짧게 태어났단말인가. 망치 손잡이가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면 전장에서 토르는 더욱 강력해질 수 있지 않을까? 토르가 저 멀리서 긴 망치를 붕붕 휘두르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정말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물론 망치가 짧으니까 어디 잠깐 보관하기도 수월하고 근접전에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토르는 이 짧고 굵은 망치를 빙글빙글 돌려서 하늘을 날기도 하고, 무자비하게 집어던져서 엄청난 대미지를 입히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토르의 망치는 매우 유용하게 설계된,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으로 봐도 되는 걸까? 공대 나온 친구에게 물었다.
야 물리학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말이야. 망치 손잡이가 조금 더 길어야 타격했을 때 전해지는 에너지가 더 큰 거 아니야? 원심력이라든지...
한참을 고민하며 노트에 이것저것 수식을 적어 내려가던 친구가 실망스러운 대답을 안겼다. 야 망치 안 그래도 너무 무겁게 생겼는데 손잡이라도 짧아야 무게가 줄지 않겠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만족스러운 대답도 아니었다. 어차피 토르는 무한에 가까운 힘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고작 손잡이 좀 길어진다고 못 들고 다닐까.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토르가 등장하는 <북유럽 신화>를 샅샅이 훑었다. 그랬더니 반갑게도 이곳에 답이 있었다. 아주 만족스럽고 흥미로운 스토리였다.
토르의 짧은 망치는 사실 '불량품'이었다.
묠니르가 어쩌다 ‘불량품’이 되었는지를 얘기하려면 먼저 토르의 부인에 대해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영화와 달리 토르에게는 ‘시프’라는 부인이 있었다. 시프는 에시르 신족 출신으로 굉장한 미인이었는데 특히 황금보다 빛나는 금발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물론 영화 <토르> 시리즈에도 '시프'라는 인물이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시프는 토르의 아내가 아닌 그냥 여러 명의 ‘전우’ 중 한 명일 뿐이다. 게다가 찬란한 금발도 아니며 심지어 큰 비중도 없다. 아무튼 영화에서 토르를 열심히 도왔던 '시프'는 원래 토르의 와이프였다는 사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토르가 곁에 잠들어 있는 부인 시프를 지긋이 바라봤다. 어느 날과 다를 게 없는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하지만 토르는 곧 너무나도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황당하게도 시프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너무 놀란 토르는 시프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다. 하지만 시프도 자신이 대머리가 된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그때 토르의 머리를 스쳐간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로키였다.
화가 치밀어 오른 토르는 그대로 로키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로키의 멱살을 잡고 벼락같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로키는 당황했지만 압도적인 힘을 지닌 토르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결국 온몸의 뼈를 모두 박살 내겠다며 화를 내는 토르에게, 지난밤 자신이 너무 취해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토르는 다시 로키를 거칠게 붙들어 세우며 시프의 머리카락을 되돌려 놓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다. 머리카락의 뿌리까지 모조리 사라져 버린 터에 시프의 금발은 다시 자라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로키에게 단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었다. 바로 손재주가 뛰어난 난쟁이들에게 황금빛 머리카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재주가 좋은 난쟁이 ‘이발디(Ivaldi)’의 아들들이라면 머리에 착 달라붙는 머리카락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토르는 로키를 놓아주며 당장 금발을 만들어 올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로키는 서둘러 ‘스바르탈페임’으로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재주가 뛰어난 난쟁이 ‘이발디 3형제’의 작업장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난쟁이들이 순수히 로키의 부탁을 들어줄 리 없었다. 그래서 로키는 이발디의 아들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재주꾼들이 누구인지를 한번 가려보자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이발디 집안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세상 제일의 재주꾼이라고 장담했다. 그러자 로키는 이들과 라이벌 관계인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요즘에는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들이야 말로 최고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비아냥 거린 것이다. 작전대로였다. 이발디 집안의 형제들은 매우 당황하며 격분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로키는 노골적인 내기를 제안했다. 신들에게 바칠 보물 3가지를 각자 만들고, 신들에게 직접 심판을 받아보자는 것이었다. 물론 3가지 보물 중의 하나는 매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여성의 황금 머리카락이어야 했다.
이발디의 형제들이 3가지 보물을 열심히 만드는 동안 로키는 잽싸게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를 찾았다. 그리고는 똑같은 내기를 제안하며 이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재주꾼은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가 아니라 이발디의 3형제라는 것. 하지만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는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평소 로키를 잘 알았기 때문에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히려 이들이 로키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로키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만약 자신들이 내기에서 이길 경우 로키의 머리를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지만 로키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토르에게 온몸의 뼈가 박살날 바에 뭐라도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들이 내기에서 지게 만든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해지니까. 로키는 기꺼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두 난쟁이 집안의 승부가 시작됐다. 시프의 금발과 로키의 머리가 걸린 흥미진진한 게임이었다.
에이트리와 브록크는 곧장 작업에 돌입했다. 형인 에이트리가 직접 보물을 제작하고, 동생 브록크는 풀무질을 맡았다. 자존심이 걸린 중요한 내기였기 때문에 에이트리는 동생 브록크에게 쉬지 않고 풀무질을 계속하게 했다. 풀무질이 너무 과하거나 잠깐이라도 멈췄다가는 최상의 보물을 만들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에이트리는 용광로에 돼지가죽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브록크는 열심히 풀무질을 시작했다. 첫 번째 보물은 '황금 털이 달린 돼지'라는 뜻의 '굴린부르스티(Gullenbursti)'였다. 이 보물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말 보다도 더 빠르고 하늘과 바다를 가로지를 수 있는 멧돼지였다. 뿐만 아니라 금색 털이 찬란하게 빛나기 때문에 어두운 밤에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신들의 전차를 끌기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이를 지켜본 로키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뜻대로 보물을 완성했다가는 자칫 자신의 머리가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키는 스스로 파리로 변신했다. 그리고 열심히 풀무질을 하고 있는 브록크를 향해 몰래 날아가 그의 손등을 있는 힘껏 깨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브록크는 파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풀무질을 이어갔다. 그렇게 황금빛이 가득한 굴린부르스티가 완성됐다.
이번에는 에이트리가 금 덩어리를 용광로에 집어넣었다. 두 번째 보물 '드라우프니르(Draupnir)'였다. 이 보물은 9일에 한 번씩 똑같은 모양의 황금 팔찌 8개를 스스로 복제해내는 신비로운 팔찌였다. 다시 브록크는 열심히 풀무질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맴돌던 파리가 다시 브록크에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브록크의 목이었다. 이 고약한 파리는 저번보다 더욱 세게 목을 물어뜯었다. 그러자 브록크의 목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금세 브록크의 목은 그가 흘린 땀과 붉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브록크는 절대 풀무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드라우프니르'가 완성됐다.
마지막으로 에이트리가 무쇠를 들고 나타났다. 이번 보물이야말로 에이트리가 준비한 최고의 보물이었다. 때문에 형 에이트리는 동생에게 이번이야 말로 최선을 다해 풀무질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브록크는 잠시 땀과 피를 닦아내며 다시 풀무질 준비를 했다. 로키는 불안했다. 이번에도 자신의 작전이 실패한다면 정말 자신의 머리가 날아갈 판이었다. 곧 에이트리가 용광로에 무쇠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브록크는 다시 풀무질을 시작했다. 두 형제의 자존심이 걸린 최고의 보물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허공을 빙빙 돌던 파리가 이번에는 브록크의 얼굴을 노렸다. 정말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파리는 브록크의 눈꺼풀에 정확히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모든 힘을 다 쥐어짜내 브록크의 눈꺼풀을 물어뜯어버렸다. 그러자 브록크의 눈에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곧 피와 땀은 한데 뒤섞여 브록크의 눈으로 흘러들어 가고 말았다. 쉴 새 없이 풀무질을 하던 브록크였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고통 속에 몸부림 치던 브록크가 잠시 풀무질을 멈추고 피를 닦아냈다. 그러자 뭔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챈 에이트리가 작업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지막 보물인 망치 '묠니르'를 꺼내 든 에이트리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풀무질이 중간에 끊기는 바람에 손잡이가 너무 짧아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훨씬 더 긴 손잡이를 만들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양손으로는 들 수 없는 한 손 망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얼굴이 온통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동생 브록크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신들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브록크의 주변을 맴돌던 검은 파리 한 마리가 유유히 작업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토르의 상징인 '묠니르'는 다 로키의 장난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또 로키의 장난에 의해 불량품이 된 다소 복잡한 운명(?)의 보물이었던 것이다. 북유럽 신화에 따르면 원래 묠니르는 양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큰 망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파리로 변신한 로키 때문에 짧아진 것이다. 대신 묠니르는 자유자재로 크기를 조절할 수는 있었다. 옷 속에 숨길 정도로 줄일 수도 또 반대로 크게 만들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묠니르는 번개를 만드는 망치인 데다가, 던졌을 때 원하는 목표를 정확히 맞출 수 있으며 또 주인의 손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궁금증은 해소되었으니 끝으로 난쟁이들의 내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소개한다. 아스가르드 신들(최고의 신 오딘, 천둥의 신 토르, 수확의 신 프레이)의 심판대 앞에선 이발디 3형제는 당당하게 3가지 보물을 소개했다. 먼저 뭐든지 꿰뚫을 수 있는 창인 궁니르(Gungnir), 천처럼 접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배' 스키드블라드니르(Skidbladnir) 그리고 수십만 가닥의 순금으로 만든 황금 가발이었다. 모두 훌륭한 보물들이었다. 특히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오딘은 던졌을 때 정확히 목표물을 맞출 수 있는 창 '궁니르'에 매료되었고, 프레이는 어디를 가든 항상 순풍을 불어오는 배 '스키드블라드니르'에 빠져들었다. 또 토르는 황금빛 금발을 시프에게 선물하며 매우 만족해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로키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신들이 모두 이발디 집안의 보물을 극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이발디 형제의 승리로 끝이 난다면 자신도 목숨을 건질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의 보물이 공개되는 순간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자신이 방해해서 불량품이 된 '묠니르'가 의외로 극찬을 받는 것을 보고 로키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승부는 박빙이었다. 특히 토르는 묠니르의 손잡이가 짧은 것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 특별한 망치만 있다면 아스가르드를 위협하던 거인들과의 싸움에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결국 승리는 로키의 기대와 예상을 깨고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에게 돌아갔다. 로키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에이트리 형제가 크게 기뻐하며 로키에게 다가왔다.
약속대로 에이트리 형제는 자신들이 내기에서 이겼으니 로키에게 머리를 내놓으라고 했다. 로키는 절망했다. 약속을 했으니 빠져나갈 구멍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로키는 로키였다. 번뜩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로키는 오딘에게 다가가 이들에게 자신의 머리는 내어줄 수는 있으나 자신의 목을 베어도 된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자신의 머리를 가져가되 목을 조금이라도 베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는 당황하며 로키에게 항의했다.
로키로서는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고민 끝에 오딘이 결국 로키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에 화가 난 브록크가 가죽과 송곳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더니 브로크는 로키의 입을 송곳으로 뚫고 가죽을 데 바늘로 꿰매버리고는 그 얄미운 입을 다물게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