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네 번 째 칼럼
영어 쓰면 돋보인다는 착각, 외국어 실력 좋으면 소통도 잘할 거란 오해
며칠 전, 영어로 관크(관객 크리티컬의 준말. 다른 이들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를 당했다.
뮤지컬 <라이온 킹> 내한 공연. 기대감에 부풀어 이미 지난가을에 치열하게 티켓을 구한 터였다.
그런데 공연 시간 내내, 객석 몇 줄 뒤에서 들려오는 “Wow!” 또는 “Oh, my!” 등의 감탄사.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 같은 유명한 곡은 아예 몇 소절을 따라 부르기까지 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30대 정도의 한국인 여성으로 보이는 이들이 내내 영어로 얘기했다. 거의 모든 대사마다 “Uh-huh”라고 맞장구치듯 말하는데, ‘난 자막 안 보고 원어로 알아듣고 있지롱!’ 티 내고 싶어 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뮤지컬 대사에 몇 번, 한국 팬들을 겨냥한 유머가 엿보이는 부분이 있다. 한국어로 “대박!”이라는 대사, ‘동대문시장’ 같은 익숙한 곳이 무대 위에서 언급되기도 하며 웃음을 유발했다. 이런 부분들에서도 예외 없이 큰 소리로 “와아아우”하는 감탄사 섞인 웃음이 들려오는 걸 보니 한국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두 시간 넘게 미국 방송 방청하러 온 것 같았다.
사실 관람을 하면서도 통역사 직업병은 멈추지 않아 더욱 즐거운 공연이었다. 주인공 심바의 친구인 날라가 먹이를 찾아 떠날 때 암사자들이 불러주는 노래에서 ‘pride’를 긍지로 번역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쓰는 ‘자부심’은 자칫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는데 긍정적인 느낌인 ‘긍지’로 번역한 부분이 좋았고 묵직한 내용이 더해져 눈물이 났다.
오프닝 곡 ‘생명의 순환(Circle of Life)’의 앞부분을 비롯해 곳곳에 줄루어 등 아프리카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강렬하고 이국적인 인상을 심어줬다. 일부 배우의 억양도 아프리카 악센트인 것 같아 궁금하기도 했다. 뮤지컬 대사와 가사의 번역, 배우들이 쓰는 언어와 억양 등이 호기심을 자극했기에 더욱 풍성한 관람이었다. 그런데 ‘관크’를, 그것도 영어로 당하게 되니 내 인생에 영어는 어딜 가나 따라온단 말인가, 한숨이 나왔다. 이날 이들이 쉴 새 없이 뱉은 감탄사는 한국어로 바꿔봐야 ‘우와, 어머나’ 정도다. 딱히 심오한 대화가 오간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어를 쓰는 관객들이 공연 중 계속해서 감동을 입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영어로 얘기하기 때문에 용인되는 양 더욱 보란 듯이 크게 말한다고 느껴지는 그 태도가 특별히 불편했다.
영어로 말하면 특혜라도 받는 걸까? 영어를 쓰는 일에 종사하다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실력 그 자체보다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에게 투사하는 일종의 이미지-유복하게 자라 외국 생활을 누렸을 것 같은-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러한 이미지에 집착하다 보니 대화의 본질은 망각한 채 영어로 한마디라도 더 해보려고 애쓰는 분위기도 생겨난다고 본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2221642005&code=96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