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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을 삶으로 한의학을 나눔으로, 차언명 한의사

by 대신만나드립니다
무더운 날이 지속되던 2025년 8월, 대만드는 경기도 광명의 '차한의원'에서 차언명 원장님을 뵙고 왔습니다. 한 자리에서 한의원을 30년 넘게 운영하면서도 교수, 한의사회 임원, 교육 강연자로서 다양한 도전을 이어나가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고민하며 나눔을 실천하시는 차언명 원장님만의 지혜를 이번 인터뷰에서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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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현 광명시 차한의원 원장

현 대한 한의사회 임원

현 경기도 한의사회 임원


대구한의대 졸업

대구한의대 한의학박사

한국 방송통신대 중문과 재학

전 대구 상인한의원 원장

전 서울 명지한방병원 내과

전 광명시 한의사회 부회장

전 경기도 한의사회 부회장

전 대한한의사회 중앙대의원

전 대구한의과 대학 한의학과 객원교수


[INTRO]


Q.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저는 광명에서 만 30년째 동네 한의원을 하고 있는 차언명 원장입니다.

Q. 요즘 원장님의 일과, 그리고 일주일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최근 일주일 중 월, 화, 수, 금 4일은 정상 진료하고 토요일은 오전 근무를 하고, 목요일은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요. 제 평생에서 이렇게 안 바쁘게 살아본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정말요. (웃음) 인생 전반기의 정리와 후반기를 위한 잠시 점검 기간을 가지는 중입니다.

Q. 원장님은 한의대 다니던 시절 어떤 학생이셨나요?


제가 외향적인 편이어서 임원을 많이 했습니다. 학년별 과 임원에도 참여하였고, 졸업할 때 졸업준비위원회 임원도 했었습니다.
예과 때는 공부를 많이 안 했는데, 성적 장학금이 욕심 나서 본과 때는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항상 앞에서 (수업을 들었죠). 그땐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 교수님들 강의하시는 거 잘 필기해서 공부 자료를 만들었답니다. OB나 복학생 분들이 ‘너 덕에 졸업했다‘ 이야기할 정도로 노트와 자료를 만들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어요.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열심히 했었던 것 같습니다.

Q. 한의대 재학 시절 어떤 모습의 한의사가 되길 꿈꾸셨고, 그 점이 현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92년 졸업인데요. 그 시절에는 임상 진료를 많이 접할 수도 없었고 지금처럼 한의사의 숫자가 많지도 않을 때였어요.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 이런 분들도 가끔 있었지만, 아직 그 시절에는 이상적으로 ‘불치병을 고치겠다’, ‘봉사를 많이 하겠다’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으니까요. 막연한 이상만 쫓는 그런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한의사가 되어야겠다는 걸 크게 생각은 안 하고 환자들을 잘 치료해 주는, 잘 낫게 하는 한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었습니다.

Q. 대구한의대학교를 졸업하시고 대구 상인한의원에서 원장으로 일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익숙한 대구가 아니라 광명에서 한의원을 여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졸업하고 2년 동안은 대구에 있었는데요. 대구에는 대구한의대분들이 80~90% 계시잖아요. 저는 고향도 대구라서 계속 대구에 있으니까 너무 답답한 거예요. 스물다섯, 스물여섯이었던 그 시절에는 더 넓은 세상에 나가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마침 그때 육촌 언니가 ‘명지 한방병원에 근무하시는 분이 이직하는데 네가 할 생각이 없냐’ 해서 과감하게 대구 한의원을 정리하고, 서울에 가서 더 큰 걸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올라왔어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올라온 거예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제 삶에 큰 변화를 준 첫 번째 일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 때는 대구를 벗어나 서울로 왔지만요. 지금 우리 학생들은 ‘한국에서 한의원을 해야지’라는 생각을 좀 버리고, 이제는 한국을 벗어나서 이 세상을 무대로 세계로 가기를 (바랍니다). 넓은 물에서 많은 경험을 해보는 게 도움이 된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의학 박사 이력과 차한의원 개원]


Q. 대구한의대 한의학 박사, 서울 명지한방병원 내과에서도 일하신 경험이 현 한의원 운영에 있어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대구를 벗어나 광명으로 온 것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경험할 기회가 되었어요. 광명은 경기도라도 서울 구로구 바로 옆이라 서울의 느낌이거든요. 그러니까 대구보다 더 다양한 계층이 여기 있는 거예요. 그 시절만 해도 외국인 노동자분들을 대구에서 못 봤는데, 광명에 오니 외국인 노동자도 있고 전국 각지에서 오신 분들이 다 있었어요. 직업도 일용직부터 해서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 선생님, 회사원 등 다양하게 많이 있었어요. 임상을 하는 데에 있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난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과목이 임상과라기보다는 본초니까요. 박사 학위를 땄을 그 당시에는 임상에 도움 된다는 느낌은 잘 못 느꼈는데, 임상을 계속하면서는 본초학을 공부했던 게 도움이 되었고 ‘플러스 알파’ 되는 건 분명히 있었습니다.

Q. 차한의원은 ‘난임, 갱년기, 여성 질환, 만성 통증 치료 전문’이라는 블로그 소개 글을 보았습니다. 이런 방향으로 특화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이거는 한의원 경영을 좋게 하기 위한 특화라기보다는 블로그 글을 쓸 시점이었던 3~4년 전부터 저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특화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나한테 많이 와서 진료를 하나’ 보니까 난임 환자분들의 치료 성공률이 굉장히 높았고요. 갱년기 여성 환자분들, 기타 심리적 문제를 겪는 여성 환자분들께서 저한테 치료받으신 뒤에 편안함을 많이 느끼셨어요. 제가 환자분들을 통해서 역으로 ‘내가 잘하는 게 이거구나’라는 거를 이제 배우게 된 거죠.

Q. 차한의원 후기를 찾아보니, 원장님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치료도 아주 효과적으로 해주시는 명의이시라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환자분들에게서 큰 신뢰를 얻고 치료를 잘 하기 위해 원장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딱 두 가지인 것 같아요. ‘너 힘들었다.’, ‘너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해 주는 위로와 ‘절대로 너는 틀리지 않았다.’, ‘넌 잘하고 있고 맞다’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요. 위로와 인정을 해주는 거죠.

Q. 그건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환자분들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 치료를 받으시러 오시는 분들한테도 적용되는 이야기인가요?

당연히 다 적용이 되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 한국 사회가 너무 복잡해지면서 성공과 발전에만 집중하고, 아이가 있다면 옆집 아이하고 비교하고 같은 반 아이하고 비교하고 그렇잖아요. 근데 그럴 필요 없다는 거죠. 우리는 한 명 한 명 생명체가 그 하나로 충분히 아름답고 완전하다는 걸 (말씀드리는 거예요). 환자분들이 “나 뭐가 잘못됐나 봐요.”, “내가 힘들어서, 내가 뭐 이렇게 잘못되게 말해서 이렇게 속상한 일이 생겼어요.”라고 하시면 “아니에요. 당신 잘했어요. 괜찮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이런 식으로 그분들을 위로해 주고 인정해 주어요. 특히 난임 환자분들의 경우는 “제가 뭘 잘못했을까요?”, “일을 너무 많이 했을까요?” 등 별 상상을 많이 하고 오시거든요. “뭘 잘못 먹었을까요?”, “제가 뭐 아가씨 때 자궁에 물혹이 있었다던데, 아가씨 때 뭐 행동을 잘못해서 섭생을 잘못해서 이런 걸까요?”라며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하거든요. 그럼 “절대로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상태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걱정들 때문에 오히려 아기가 당신을 만나러 오는 걸 방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드리죠. 이런 환자분들께는 인정이라기보다는 그냥 위로해 주는 게 더 큰 것 같아요.

Q. 한 지역에서 오랜 시간 한의원을 운영하시면서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한의원 운영의 측면에서는 나 혼자만의 위기가 아니라, 큰 정치적인 이슈나 한의원에 전체적으로 문제 되는 이슈가 생길 때 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다음에 제 개인적 위기라고 하면 차한의원 환경의 위기가 있어요. 여기가 광명 뉴타운이라 한의원 길 건너편에 약 3천 세대가 1년 반 전에 이주했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광명시 인구도 줄고 주민 수도 줄어드니까 환자가 줄었죠. 근데 이건 기다리면 회복이 되는 거고요.
개인 인생에 대한 위기는 결혼한 후에 두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게 가장 큰 위기이기도 하고 선물이기도 했습니다. 임신할 때부터 아이를 누가 키우고, 아이가 집에 있을 때 한의원 가서 일을 어떻게 하고... 걱정이 많이 되는 거예요. 한의원 나오면 아이들 걱정이 되고, 집에 가면 또 아이들 걱정 때문에 한의원 경영이 잘 안 되고 그랬죠. 어린 시절의 저는 그런 고뇌를 했어요. 여자 원장에게 있어서는 출산과 양육에서 가치관 정립을 잘 해야지, 안 그러면 그때 멘탈이 좀 부서지거나 힘들 수가 있어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의 사례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인터뷰 질문 중 가장 고민되었던 부분인데요. 이런 분이 딱 한 분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장애우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도 몇 분 떠오르네요.

한 분은 무뇌아 아버지셨어요. 아이가 18년 동안 침대에 누워 있는데 엄마가 경제를 책임지고 아빠가 아이를 다 케어하고요. 아빠가 그러다 힘들 때 침 맞으러 오시고 그랬어요.

또 출산 때 곧 죽는다고 집에 그냥 데리고 가라 했던 아이가 살았는데 시각, 청각이 약한 경우가 있었어요. 시각은 그래도 좀 보이는데 청각 장애인이 된 아기였죠. 그런 애들은 선천적으로 몸이 많이 허약해요. 그 아이가 저한테 보약 지으러 해마다 와서 대학생 된 이후까지도 왔었는데요. 이렇게 초등학교 때보다 중학교 때 더 건강해지는 아이들 보면 굉장히 보람이 있어요.

사실 한 분을 콕 집을 순 없고요. 오랜 시간 이 동네에 있으니까 가족들의 역사와 함께하는 거, 그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아기 때 왔다가, 중고등학교 때 왔다가, 청년이 돼서 왔다가, 결혼해서 자기 애들 낳고 또 오고 그런 것들이 제가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요. 이제 제가 나이가 드니까 이렇게 믿어주시고 오시니 너무 감사하다고 느껴요.

우리가 요즘 한의원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이 지역 안에서 지역 의료에 많이 동참하면 결국은 1차 의료의 역할을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긴 시간 (진료)하면서 느끼는 거죠. 그래서 지역사회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브런치에서의 연재, 강연 활동]


Q. 원장님께서 브런치에서 ‘백일백장 글쓰기’를 하시고, 블로그에도 꾸준히 글을 올리시는 것을 봐왔습니다. 이런 연재 활동을 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코로나 시절 무료 줌 강의들이 많아서 여기저기 강의를 살펴보다가 우연히 ‘백일백장 글쓰기’를 만났습니다. ‘백일백장 글쓰기’는 100일 동안 한 편씩 블로그 글을 올리는 건데요. 그냥 ‘아무 말 대잔치’였던 것 같은데도 어쨌든 완주를 했어요. 하고 난 다음에 거기 있는 글들을 선별해서 브런치에 작가 응모를 하니 바로 1회에 합격되었어요.
제가 좀 더 젊을 때 독서를 많이 했었는데, 책을 읽고만 마는 거는 꼭 우리 영어 공부할 때 영어로 문법만 공부하면 말 못하는 거하고 똑같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글로 쓰거나 누구한테 강의를 하는 거는 영어 말하기를 잘하게 되는 거랑 같은 것 같더라고요. 코로나 시절에 이런 시스템을 우연히 만나서 하게 됐는데, 글쓰기를 하면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이렇게 글쓰기를 통하면 머릿속도 더 정리되는 것 같고요.

Q. 한의원이랑 같이 하시면서 글쓰기를 꾸준히 하신 게 되게 대단하신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처음엔 글쓰기가 정말 어렵고 막막했어요. 그랬지만 누군가에게 이야기 해준다는 기분으로 말하는 것을 적는다고 생각하고 하니 조금 쉬워졌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지를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사람이고, 몇 시에 일어나면 육체 활동이 좋고, 몇 시에는 글이 잘 써지고, 몇 시에는 이런 게 잘 되고 그런 걸 알면 좋죠. 제일 처음에는 무작정 밤에 글 쓰려니까 너무 괴로웠는데요. 저는 오전에 글이 잘 써지는 스타일이어서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일단 글을 쓰려고 노력해요.


Q. ‘비즈인큐’, ‘호모앤벤져스’ 등에서 강연을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자녀 교육과 원장님 개인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에 부담은 없으셨나요?


현장 강의도 했었고 줌 강의도 여러 차례 했죠. 처음에 해달라고 부탁이 왔을 때 많이 부담스러웠는데 제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사교육 많이 안 하고 아이들이 자기들 원하는 길로 가게 했으니까, ‘이런 길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딱 한 가지 생각 때문에 강의를 하게 됐어요. 다른 부담은 그냥 내려놓고요. 어차피 내가 광명에서 차한의원 하고 있으니 검색만 하면 내가 누군지는 누구나 다 아는 거니까요. ‘이런 방법으로 키운 사람도 있구나’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강의들을 했고요.

이런 자녀 교육 강의 말고도 우리 광명시 성당이나 노인대학 이런 곳에서 ‘한의학과 건강’ 강의도 했고요. 문화센터 단기 강의 같은 것도 같이 하고 그랬죠. 다양하게 계속 강의도 하고 사회 참여를 많이 했습니다.

Q. 강연이나 브런치 글, 블로그 글을 보고 한의원에 방문하시는 경우도 있나요?

이걸 보고 엄청 많이 오는 건 아니지만 보고 오시는 분들은 있으세요. 그리고 보고 왔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데 진료를 다 마치면 이제 이렇게 나가시다가 슬그머니 “글 읽었어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부끄럽게 계시기도 해요.
연령별로 선호하는 SNS가 달라서 연령이 있는 분들은 네이버 블로그 글, 네이버 검색을 통해 오시는 것 같아요. 세대별로 취향들이 다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SNS를 통해서 한의원 홍보를 많이 하려면 모든 매체에 다 올리는 게 제일 좋긴 한데, 원장이 그걸 다 하고 있기에는 힘들 것 같아요.

Q. 원장님 개인으로서의 삶과 한의사로서의 삶을 병행하시는 것에서는 어려움이 없으셨나요? 균형을 맞추신 원장님만의 방법이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잘 몰랐습니다. 30대, 한의원 10년 차 되기 전에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나는 왜 이렇게 바쁘고, 나는 왜 이렇게 일복이 많고, 애도 키워야 되는데 한의원도 해야 되고... 너무 힘들었죠.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에서 인생의 중요도를 매기고 그 순서대로 일을 하라 그러잖아요. 독서 안에서 이런 팁을 찾게 되어서 10년 차 이후부터는 차츰 정리를 했습니다. 일과 가정 사이 균형을 맞추는 게 어려웠지만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더라구요. 아이가 있으면 첫 번째는 아이들. 한의원 문 닫고라도 아이에게 문제가 있으면 가야 돼요. 그러면 중요한 게 가족이고 그다음에 뭐고. 그 순서대로 이거 먼저 하고, 내가 이제 여유가 있을 때는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후순위의 일을 하는 거고요. 그런 식으로 순위를 매겨서 하면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다 저절로 된다는 거죠.
그리고 실수 안 하고 해내는 사람은 없어요. 처음에는 다 좌충우돌하고 실수하고 그래요. 이렇게 독서를 통해서 간접경험이나 해답을 얻고, 직접 경험하면서 나름 노하우를 찾게 되는 거죠.

Q. 원장님께서 엄격한 엄마였다가 자녀를 그 사람 자체로 인정하게 되셨다는 강연 내용과 원장님만의 자녀 교육 철학을 굉장히 인상깊게 들었는데요. 그런 교육 철학이 환자들을 마주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네, 맞아요. 원장은 좀 카멜레온이 돼야 돼요. 내성적인 환자분한테 자꾸 질문하면 그 사람 우리한테 절대로 안 오죠. 외향적이고 자기 이야기를 막 따발총처럼 하시는 환자분들한테는 “맞아요, 맞아요.” 하면서 이야기를 들어줘야 되죠. 그렇게 맞추는 것처럼 자녀 교육도 똑같은 거예요.
우리 둘째 같은 경우는 자주 독립적이어서 자기한테 간섭하는 걸 싫어해요. 그럼 믿어주고 기다려줘야 돼요. 근데 큰애 같은 경우는 또 시시콜콜 이야기하고 엄마 어쩌냐 그러고 자유롭게 이해해 주고 대화하고 이런 걸 또 좋아해요. 그러면 거기에 맞춰서 엄마가 다양하게 변해야 돼요. 엄마도 인간이니까 너무 힘들어서 안 될 때는 엄마라고 어른이라고 걔한테 권위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오늘 너무 피곤해서 네 이야기를 못 들어주니까 내일 해 주면 안 될까?” 이런 식으로 인간적으로 해야 되겠죠.
그래서 환자분들도 그래요. 말씀을 많이 하는 환자분 이야기는 늘 잘 들어줬어요. 근데 너무 힘든 날에는 “어머니, 제가 어제 잠을 못 자서 좀 힘든데 이 이야기 여기까지만 듣고 내일 더 많이 해주면 안 돼요?” 이렇게 하는 요령이 생기는 거죠.
처음 한의사 되었을 때는 명의가 되고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한의원을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이제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아 환자분들이 여기 와서 쉬었다 가고 위로받고 가고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휴식. 요즘 분들은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항상 뭔가를 해야 돼요. 특히 젊은 분들일수록 그렇죠. 그래서 한의원 와서 침 맞는 시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나랑 이야기할 때는 위로받고 가는 시간. 그렇게만 해도 온몸에 신진대사가 더 잘 되고 기혈 소통이 잘 돼서 치료가 잘 되겠죠. 거기에 치료 효과 좋은 침 치료를 받고 한약을 먹으면 더 잘 되겠죠.

그러니까 (자녀 교육관과 환자 치료 사이에도) 서로 굉장히 밀접한 연관이 있어요. 결국은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거잖아요. 그러면은 그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고 그분이 무엇을 원하는가 이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나의 니즈가 아니라 그들의 니즈를,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그런 게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이해를 잘하고 편안하게 해주려면 경험이 쌓여야겠죠. 저도 100명의 사람을 다 이해하지는 못해요. 그래서 멀어지는 사람도 있긴 있는데 그거는 그분들과 나의 인연이 끝인 거예요. 환자분들도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잘해도 또 삐져서 안 오시는 분들 있어요. 그러면 그분과 나의 인연이 그냥 여기까지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요. 그거에 ‘실패했다’, ‘실수였다’ 이런 생각은 앞으로 임상하면서 절대로 안 가지셔야 해요.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삐져서 안 오고 이러면 그건 우리가 인연이 끝인 거예요.

[교수, 한의사회 임원, 한의원 원장으로서의 다양한 지역사회 활동]


Q. 지역사회 활동과 사회 공헌 활동에 큰 관심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 활동을 오랜 시간 다양하게 지속해오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광명시에 임원을 처음 할 때가 한 15년 전쯤인 것 같아요. 그때 우리 임원 멤버진이 서로 마음이 맞고 일을 잘했었어요. 저희가 오창영 회장님 아래에서 경로당 주치의 제도를 전국에서 최초로 했습니다. 지자체 보건의료 예산이 많은데 해마다 남는다는 걸 알고, 광명시 임원 모임에서 한의원에서 진료만 하는 것보다 지자체와 관련해서 할 게 뭐 없을까? 하고 (이야기했어요). 그때 치과에서 초등학생들 검진 무료로 해주는 사업을 보건소에서 할 때였거든요. 그렇게 공유하다가 그러면 경로당 주치 사업을 하자고 해서 예산을 따내고 하기 시작했거든요. 경로당 주치의 사업은 초창기에는 진료와 건강 강의를 병행해서 했는데요. 최근 몇 년은 원내 진료가 아닌 원외 진료는 불법에 해당된다는 보건소 지침에 따라 건강 강좌를 주로 하고 있어요. 한의학에 대한 설명과 노년기 건강에 대해 말씀드리고, 식이 요법, 건강 생활 방식, 건강 지압법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보니 우리 지역 안에서 우리 지역의 예산으로 한의학도 홍보되고 지역 주민한테도 도움 되는 일이 이런 거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런 것들이 점점 확대되면서 나중에 난임 사업 이런 것도 경기도나 타 지역으로 확대되고 그렇게 된 거죠.

지금은 광명이 신도시로 돼서 핫하지만, 처음 왔을 때는 광명시가 경기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동네였어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계속 살고 경제 활동을 하는데 이 지역이 잘 되면 좋잖아요. 그런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임원하시던 분들하고도 같이 생각이 같아지고 해서 진행했어요.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Q. 경로당 주치의 사업 외에도 진행하신 지역사회 활동이 있으실까요?

앞서 말했듯 광명시에서는 난임 사업도 있었어요. 이건 지자체의 예산을 따내서 하는 거였어요.

근데 꼭 지역사회에 예산을 따내는 사업만 하는 건 아니에요. 12년 전에 제가 살던 동네에 청소년 센터가 있었는데 거기에 운영위원도 몇 년 한 적 있었거든요. 청소년 센터의 각종 행사 운영에 대해서 상의하고 결정하는 일이었는데요. 한의학과 관련된 행사나 봉사는 아니었지만, 지역주민으로 청소년 일에 동참하고 도움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또 청소년 관련 일로, ‘진로 멘토링 사업’이라고 교육청에서 각 학교에 직업 소개하는 강의가 있어요. 몇 년 동안 매 학기마다 여러 중, 고등학교로 나가서 한의사 소개 강의를 했습니다.
성당, 노인대학에서 건강 강좌도 했었고요. 또 수어 봉사 같은 것도 조금 배워서 했었습니다.

지금은 여한의사회가 MOU 맺어 멘토링하고 있는, 영등포에 있는 ‘마자렐로 센터’가 있어요. 6호 보호처분 받은 청소년들을 3개월 보호 관찰해 주는 센터인데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데예요. 여한의사회가 하기 전에는 저와 광명시 한의사회 강영건 회장님과 함께 10년 정도 2주에 한 번씩 봉사를 나갔습니다. 현재는 인근 지역의 수녀원에 연로하신 수녀님들 치료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봉사 나가고 있답니다.


Q. 경기도한의사회, 광명시한의사회 등 한의사계에서 꾸준히 활동하시게 된 계기와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거는 또 광명시 임원분들 이야기에서 연장인데요. 광명시 임원분들 중에 오 회장님이 경기도 임원을 하시면서 카풀로 같이 수원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 같이 즐겁게 경기도 일 하지 않겠냐 제안해서 함께 일하게 되었어요. 어려운 건 별로 없었고 굉장히 즐겁게 했습니다.
경기지부 일할 때는 국제 문화 쪽 일을 많이 해서 ‘아르메디’ 행사나 경기도 내 한의사 아토피 지원 사업도 주관해서 했었고요. 또 경기도에서 대만 교류 활동하는 것도 했어요. 특히 중의사분들을 초대하는 행사가 무척 좋았습니다.

Q. 한의사들의 활동을 확장하고 지역사회와의 연결성을 높이는 데 노력을 기울이시는 것 같은데요. 앞으로 한의학이 어떻게 확장되기를 바라시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앞전에 보건소 활동이나 경로당 주치의 같은 여러 지역사회 활동을 이야기했죠. 사실 저 말고도 주변의 한의사분들 중 여러 지역이나 단체에 봉사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의사계의 확장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된다고 답변은 못 드리겠지만, 이렇게 조용히 활동하시는 분들 덕분에 희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살아오면서 우리 애들 아플 때, 제가 아플 때 항상 한약과 침으로 다 치료하고 했었거든요. 이렇게 한의학 치료가 워낙 우수하고 좋으니 한의학이 어떤 형태로든 확장되고 지속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제 자랑을 하려고 이런 (지역사회 활동 및 봉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랍니다. 저보다 더 많이 봉사하고 활동하시는 분들이 계시니까요. 각자의 역량이 닿는 대로 활동을 하는 게 한의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은 되는 것 같아요. 봉사하는 곳에서 만나는 분들이 “이게 침으로 되는 줄 몰랐어요.”, “그렇게 하니 이게 낫네요.”(말씀하세요). 그런 아주 사소한 한의학적 경험을 하게 됨으로써 이분들이 나중에 한의학을 다시 찾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시는 분만 기다린다는 의미보다는 우리가 자꾸 나가야 된다는 거. 외부 행사에 한의학 부스 마련하고 이런 것들도 굉장히 좋은 사업이죠. 그렇지만 큰 행사의 부스보다 내 지역 안에 원하는 곳에 가서 그런 것들을 해주면 한의학 경험을 받는 사람들을 더 늘려서 한의학 시장이 넓어지지 않을까요? 저는 거창하게 목표를 세우고 한의학이 이래야 한다 생각하기보다는 작은 한의원 한 군데 한 군데에서 이렇게 작게라도 하면 한의학의 미래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Q. 그러면 원장님께서는 한의사계가 작은 지역사회 내 일부터라도 함께 하면서 조금씩 한의학적 경험을 다들 넓혀가기를 원하시는군요.

예를 들어 제가 수어를 조금 어설프지만 배웠거든요. 우리나라 농아인들이 집계된 분만 하면 40만에서 50만 명이래요. 근데 집계 안 된 분까지 하면 100만 명은 넘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농아인들 아프면 어디로 갈까요? 제가 그 수어 봉사하는 데 가서 농아인들 몇 번 만나니 그분들은 아프면 침 맞으러 와요. 근데 다른 농아인들은 아프면 그냥 가서 주사 맞고 약 먹고 끝나요. 그러니까 수어를 배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의학 경험을 못 해 본 곳에 경험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우리는 한의원 원장 한 명 한 명이 한의학 홍보 대사인 거예요. 한의사협회가 홍보를 하는 게 아니고요. 물론 한의사협회가 해야 될 게 있겠지만, 각자가 한의학 홍보맨이 되어서 내 집에서부터 가족과 친척들이 한약과 침을 경험하게 하고 또 경험 못하는 다른 사회 계층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건 정말 확고한 제 생각입니다.

Q. 대구한의대학교 본초학 교수로 강단에 서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 교수라는 진로에도 관심이 있으셨나요?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2000년대 초에 처음으로 서부일 교수님이 시간 강사 좀 자리 비니까 해달라 했을 때는 2년 정도 아무것도 모르고 했는데요. 몇 년전에 다시 연락 왔을 때 너무 기분 좋게, 즐겁고 행복하게 강의를 했어요. 근데 강의를 하면서 오히려 우리 학생들한테 제가 더욱 에너지를 얻었어요. 제 나이에 어디 가서 20대 분하고 대화를 나눠요. (웃음)
그래서 이제 교수라는 직업은 관심이 있었던 직업은 아니지만 가르침에 대한 욕구나 흥미는 있었기 때문에 요청이 왔을 때 흔쾌히 했고, 할 때 내 공부도 됐지만 우리 학생들 만나면서 더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았어요. 해보니까 강연이나 학생들을 만나는 그런 데서 많은 에너지를 얻었더라고요.

Q. 대학 강의와 한의원 운영도 도맡으시면서 개인적 공부도 꾸준히 하시는 것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는데요. 이런 바쁜 삶을 살아가며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하시는 원장님만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겁게 살면 좋은게 인생인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으니, 이것 저것 관심 가는 부분을 해본 것 같습니다.

평균 수명이 너무 많이 늘어나잖아요. 제가 만약에 100세까지 산다 했을 때 42~3년을 지금 알고 있는 걸로 산다는 건데 (그건) 안 되죠. 지금 뭐 AI다, Chat GPT다, Gemini다, 하면서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는데.

한의원 원장으로 일하면서도, 제가 혹시라도 은퇴한 후라든지 더 나이 들어서 지금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있으면 이 세상에 적응을 못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렇다고 뭐 위기감이나 불안함을 느끼고 이런 건 전혀 아니지만요.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 보는 것이 저는 매우 즐겁고 재미있어서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Q. 영어나 중국어 쪽도 계속 공부하시며 대학원도 갈 계획이 있으시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계속 이런 공부를 지속하시는 것은 한의사로서의 지평을 넓하시기 위함인지, 개인적 성장을 위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학교 때 굉장히 못했던 게 외국어예요. 근데 외국어 공부를 나이 들어 하니까 참 재밌더라고요, 학교 땐 그렇게 싫었던 외국어가. (웃음) 그리고 외국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몇 년 전에는 방송대 영문과도 한번 해보고요. 중문과는 하다가 코로나도 있고 대구한의대 강의 오느라 지금 1년 과정 남아 있거든요. 그래서 이번 가을에는 다시 복학을 신청했어요. 방송대 공부가 스스로 공부하게 하는 데 굉장히 최적화된 시스템이더라고요. 주위에 원장님들 중에도 방송대에 (많이 다니세요). 우리가 학부가 있으니까 3학년에 편입해도 되는데, 제가 아는 원장님 중 법학과를 1학년부터 해서 다 듣고 법학 학사 따신 분도 계시거든요. 주위에 멋있는 한의사분들이 참 많으세요.

아직 졸업도 안 한 제가 공부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좀 부끄럽기는 한데. (웃음) 만약에 한의원 하시면서 새로운 공부를 더 하고 싶다 그러면 굉장히 비싼 유료 강의도 많이 있겠지만, 방송대 한 학기 등록금 35만 원밖에 안 하고 교재도 너무 잘 돼 있고 스스로 공부하기 좋게 시스템이 되어 있어요. 중국어는 해보니까 재미있어서 계속 공부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한의사분들 중에서도 다양한 언어를 잘 하시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러면 그런 재능을 숨겨만 두지 마시고 한의학을 세계에 홍보하는 데 재능을 쓰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아주 조금 배웠는데도 대만 중의사들하고 교류를 하고 있거든요. (그 과정에서) 요즘 대만은 이런 식으로 침을 놓는구나 들을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우리는 침병에 색깔이 없잖아요. 근데 대만은 침병 색깔이 있어요. 그래서 발침할 때 헷갈리지가 않아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이런 걸로 돼 있는 거예요. 이제 대만 분들도 한의학에서 하는 거 보고 도움을 받듯이, 우리도 그런 걸 보면서 사소한 거지만 도움을 받는다던지.
1년 반 전에 제가 대만에 가서 특강을 했었거든요. 그때 (만난) 졸업반 학생들이 이번 6월에 중의사 시험 끝나고 놀러 오셔서 같이 삼겹살도 먹고 서울 타워도 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대접을 받고 가신 후에 우리가 대만에 가잖아요? 그럼 정말 융숭하게 대접을 해 주시거든요. 중국 문화가 그래요. 꼭 겨울에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크게는 한의학의 홍보를 위해서 어학을 알면 좋고, 작게는 다른 나라 분들하고 교류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다는 그런 것도 있죠.


Q. 대만 가오슝의 중의대에서 강의하신 건 어떠한 계기로 하게 되셨는지, 어떤 내용으로 강의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앞서 경기도 임원 시절 대만 중의사 분들과 교류하면서 알게된 의수대학 정홍강 교수님 초대로 대만에 가게 되었어요. 초대받기 전에 2023년 ICOM 행사에서 중의대생들을 만났구요.

가오슝 의수의대의 중의학과에서는 본4 학생들을 상대로 한의학에 대한 소개를 했어요. 한의학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사암침법, 체질침법, 사상의학, 체질의학 등 중의학과 다른 부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했습니다. 특히 사상의학에 대해 의수중의학과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관심을 가져서 이 부분 설명을 많이 했었습니다.

Q. 한의사로서 다양한 활동에 도전하시면서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활동과 가장 즐겁게 하셨던 활동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분명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텐데 지금은 한의사로 활동하면서 어려웠다는 생각보다는 한의사 해서 좋았다는 생각이 더 많습니다. 제일 즐거웠던 거는 광명시 임원분들하고 10년 가까이 즐겁게 임원 생활했던 거요. 저의 40대를 이분들과 너무 즐겁게, 광명시가 발전하게끔 한의학적으로 도움되게 했다는 게 굉장히 보람차고 즐거운 일이었어요.

Q. 앞으로 더 기획하고 계신 활동이나 넓혀가고픈 분야가 있으신가요?


일단 할 수 있는 어학을 더 열심히 할 거고요. 그다음에 우리가 ‘식약동원(食藥同源)’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먹는 음식이 나 자신을 만들어요. 그래서 음식과 한의학의 연관성에 대해 꾸준히 더 해볼 생각입니다.. 그건 생각만 하고 아직 배우진 않았어요. 대부분의 한의사분들이 환자분들과 상담할 때 당신 체질은 이런 양념류가 맞고 안 맞고, 이런 과일이 맞고 안 맞고 설명을 해드리거든요. 음식과 관련된 쪽도 한의사가 진출하면 체질에 맞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


Q. 다시 학생으로(저연차 한의사로) 돌아간다면 스스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제가 운동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나이 드니 꼭 필요한게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장이 건강해야 한의원도 잘 되고 환자들도 잘 낫습니다다.

다음에 경험의 수치를 늘려라. 한의학 공부는 당연히 해야 되는 거잖아요, 한의대생이니까. 그리고 처음 한의사 됐을 때도 한의학 공부 아직은 좀 더 하셔야 될 거 아니에요? 그건 당연히 하는 건데 그 이외에 뭘 더 한다 그러면 정말 남들 하는 거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거, 뭔가 경험을 더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남들 하는 운동, 남들 하는 공부, 남들 하는 똑같은 휴가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근데 지금 젊은 분들은 좀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않으신가요, 우리 때보다? 우리는 무조건 똑같아야 된다는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이라 (웃음) 평준화 시대에 이 안에 들어가야 너는 정상이고 이 밖은 비정상이야. 이런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라. 결국 경험을 많이, 모든 경험을 다양하게 해보라는 거.

Q. 다양한 진로에 계속 도전하시는 원장님께서 진로 고민이 많은 한의대생들에게 조언 한 마디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진로 고민은 항상 되겠지만 고민할 시간에 몸을 움직여라. 경험을 하라는 말과 똑같이 통하죠. 그다음에 고민했는데 최선의 답이 안 나와.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답이 안 나와. 그러면 1번을 해봐요. 안 맞으면 딴 거 하면 되는 거예요. 1번 할까? 2번 할까? 3번 할까? 고민할 시간에 경험을 더 하고요. 물론 신중하게 생각해서 내가 1번을 선택했는데 이게 나랑 잘 맞으면 좋지만 인생에서 그렇지 않을 확률도 굉장히 높잖아요. 저희 아들하고 딸들한테도 그러는데, 1번 해 보다가 아니면 빨리 딴 걸로 바꾸라고 그래요. 다른 부모님들은 몇 년은 해봐야지 막 그러잖아요. 근데 그걸 또 제가 틀렸다고 말하기는 그래요. 그렇지만 저한테 만약에 조언을 구한다면요. “한두 달 했는데 너무 아니면 빨리 딴 거 해. 2번도 해보고 3번도 해보고 해서 나한테 맞는 걸로 찾아가면 되는 거지.” (라고 할 것 같아요). 90년대, 2000년대처럼 한 군데에서 오래 있으면서 맞나 안 맞나? 너를 검증해 봐.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OUTRO]

Q. 인생에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UP) & 가장 힘들었던 순간(DOWN)과 그 극복방법이 궁금합니다!

아까 답변한 건데 아이를 출산하고 육아하는 게 가장 뿌듯하면서도 가장 힘들었던 순간 같아요. 근데 이 또한 다 지나갑니다. 아이들은 큽니다. 잠만 자는 아이도 크고 아픈 아이도 크면서 건강해지고 아이들은 다 커서 언제 저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커 버리더라고요. 물론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에너지를 뺏기고 힘든 순간은 맞아요. 제가 그때 여러 여자 선배님들한테 조언을 구해보면 열이면 열 다 ‘우리 돈 적게 벌어도 애들이 우선이야’ 그랬는데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 아이의 5살, 6살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안 오거든요. 근데 엄마가 일한다고 맨날 애한테 얼굴도 안 보여주고 같이 안 있으면 걔한테 엄마라는 존재는 어떻게 어떻게 기억이 될까요? 그래서 기쁘지만 힘든 순간이 출산과 양육을 하던, 아이도 어린 시기이지 않았을까.

Q. 앞으로의 장기/단기 목표가 궁금합니다.

제가 계획표 짜고 목표 정하고 이런 걸 참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요. 작년에 아픈 게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그래서 이제는 너무 계획적으로 사는거 좀 덜 해도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동안 너무 나를 막 이렇게 몰아붙였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는 뭐 ‘삶의 가치관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로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목표가 달라진 거죠. 이렇게 해서 몇 살에는 돈 벌고 몇 살에는 집 사고 몇 살에는 어떻게 되고 그게 아니라요. 어떤 단어로 표현하면요. 이제는 가치관이라는 게 결국 한의원 하는 거하고 똑같은데, ‘다른 분들한테 위로와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라고 마음 먹었어요.

Q. 특히 원장님만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 것, 글 쓰는 것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출판 쪽으로도 계획이 있으실까요?


한 2년 전까지도 욕심이 많이 났는데 출판도 인연이 닿아야지 하더라고요. 출판하겠다 하고 책 쓰려고 앉아 있으니까 죽어도 책이 글이 안 써졌었어요. 그래서 이 또한 그냥 자연스럽게 될 때 되면 되겠지라고 편하게 그냥 생각하고 있어요. 억지로 이거를 딱 이루겠다 목표를 삼기보다는 그냥 버킷리스트로 남겨두고, 이제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려고 해요.

Q. 앞으로 원장님께서 하시는 일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까요?


‘모릅니다’가 정답입니다. 물리학에서 북경에 있는 나비가 펄럭거리면 뉴욕에 비가 온다고, ‘나비 효과’라는 거 있잖아요. 아까 지역사회 이야기하고도 일맥상통한데요. 나의 작은 활동, 노력 이런 것들이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하지 않을까요? 우리 광명시에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으니까요. 한의학에도 조금은 도움을 줄 거고요. 그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한의학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Q. 대만드가 다음에 만나보면 좋을 것 같은 분이 있을까요?

황성연 원장님이 있어요. 남자 원장님인데 시골에서 한의원을 30년 가까이 해서 시골 한의원에 대해 인터뷰하기 좋을 것 같고요. 이분이 와인 소믈리에예요, 요즘 젊은 분들이 좋아하는. 그래서 대구 경북 쪽에 와인 강의 이런 거 다 다니시고 하는 분이거든요.
그다음에 오창영 회장님. 지역사회와 연계되는 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고요. 이분 생각 때문에 저도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이번 차언명 원장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의사로서 발전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도전을 거듭해야 함을, 또 이렇게 배우고 얻은 것을 기반으로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귀한 시간 내어 지혜와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고 이야기를 들려주신 차언명 원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Interviewer. 카피바라

Writer & Editor. 카피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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