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동이 Dec 24. 2019

유학 6년,우울함과 독대하는 연구원의 우울 해설 1-1

분노 편: 첫 번째 답

분노 편: 첫 번째 문제를 출제했습니다. 당시 저의 감정을 문제에 담는 것과 동시에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참말로 어렵군요. 어려운 것은 곧 재밌는 것이니 더욱 안정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게 되면 신나는 마음으로 개정판 또한 검토해봐야겠습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문제의 분노에 대해 조금 정리를 하고 가겠습니다.


이야기 정리


선배α의 이기적인 부탁을 이겨내지 못하고 분노가 쌓인 채로 마주한 것은 부서진 저의 집이었습니다. 분노에 분노가 더해지니, 그것이 저로 하여금 선배α를 밀어내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상처 받은 선배α가 저를 두들겼죠. 악에 받쳐 반박을 하던 저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내버려 두게 됩니다. 이야기는 더 있지만, 이번 문제의 범위는 여기까지입니다.


지금부터 주변에서 들은 조언을 소개해가며 그것이 왜 저에겐 적용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변명을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저의 선택을 소개하겠습니다. 조언을 최대한 많이 소개해 드려야 여러분들이 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풀이법이 많아지는 것인 만큼, 제 머리가 이해하기로 아주 좋은 조언들을 소개해드리겠지만, 지금의 글쓰기 방법으로는 조언 하나에 변명 하나인 것인지라, 궁색한 변명만 늘어나는 것이 부끄러우니 적당히 골라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상투적인 얘기들을 벗어나 진정 우리네 가슴속 이야기 그 흐름 되는 실들을 풀어내 따뜻하게 목도리라도 만들 겁니다.


무엇이 나를 우둔하게 만들었는가


사소한 감정, 큰 감정 모두를 소중히 다루어야 함에 틀림없겠지만, 그것에 치우쳐 우둔한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이 미생의 숙명이라고 하기에는 분명히 후회스럽습니다. 


저의 선배 β는, 감정과 문제를 달리 보라고 입이 닳도록 충고했습니다. 선배 β는 정말 그랬습니다. 화가 나더라도 그것을 접어두고 사과해야 할 때 사과하고, 상대방이 고쳐주길 바라는 것을 전할 때의 표정은 누그러웠습니다. 감정적 문제의 재발을 막기 위한 선배 β의 대처는 확고했고, 더욱 놀랍게도 그의 대처에서 어떠한 분노도 느낄 수 없게끔 선배 β는 그것을 조절했죠. 다만 저는, 일이 벌어지면, 속이 풀리기 전까지 저의 감정이 멋대로 뻗는 것을 막기가 정말로 어려운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날뛰는 감정을 속에 담고 그저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와중에 상대방에게 사과를 하고, 저의 입장을 전달하여 협의를 이끌어내기에는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그저 참는 것이 급급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소한 감정은 그때그때 풀어나가라는 조언도 많이 들었습니다. 좋은 방법입니다. 상대방과의 관계를 단단히 하면서도, 저의 감정을 깨끗하게 하는 개방적인 방법이죠. 선배 β는 이 방법 또한 적절히 사용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석연찮은 부분은, 사소한 감정이 정말 끊임없이 발생하고, 사소한 파도는 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사그라들고는 제 마음 응어리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사소한 실타래 하나 응어리에서 끄집어내는 일조차 서투른 제가, 그것을 꺼내놓게 되는 시간은, 감정의 원인이 모두에게 잊혀서, 기억하더라도 단순한 해프닝이 돼버리는 시간입니다.


제가 선택한 조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가까이 유지하는 것에는 큰 책임이 발생하니, 책임지지 못할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전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만큼만의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이 조언은 주로, 사회의 경험이 적은 무지함으로 인해, 그 누구와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순진한, 마음이 헤픈 사람들에게 효과가 큰 조언입니다. 물론 제가 그랬습니다. 가까운 관계에선 큰 책임이 발생한다는 것, 추상적인 이 말이 어떠한 의미인지, 논하고 싶습니다.


의지하려는 것, 홀로 서는 것


세상은 크고 작게 우리에게 과제를 던져줍니다. 작게는 대학교 과제, 아르바이트, 자격증 에서부터, 가족과의 문제, 경제적 문제 까지 이어지는 시련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 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족보를 구해 시험을 치르는 사람이 있고, 족보 없이 공부해 시험을 치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를 비판하고 후자를 칭찬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적 기능을 하는 존재니까요. 어려운 것은, 사회적인 연결의 거리를 유동적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죠. 도움이 필요할 때야 수도 없이 도처에 널려있지만, 언제 비로소 내가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말을 할지, 어느 때에 홀로 맞설지 구별하는 것은 각자의 답이 너무나 다릅니다. 


뻔하다고 하면 뻔한 말입니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워라. 그런데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사람들에게 이건 뻔하거나 상투적인 말이 아닙니다. 사소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자신에게 처한 문제 전반을 남에게 물어가며, 의지하는 것은 친근감의 표현으로서 최적이겠지만, 사소한 문제에서 마저 홀로 설 수 없는 사람을 대신해서 문제를 풀어주는 사람의 마음은 부담스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매주 시험이 있고, 그 시험을 매번 물어본다면, 그 사람은 당신을 위해 매주 자신을 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의 여유를 즐길 시간도 없이 당신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면, 분명한 사실로서, 그 사람은 주체를 잃게 됩니다. 주체를 잃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겁니다. 나는 나로 사는 것인지 의아하게 되는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상대방이 당신을 너무도 좋아해서 자신을 위하지 않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을 즐거워하더라도, 상대방은 적어도 자신의 취미를 즐길 수 있도록 시간을 할애애야 합니다. 여유가 없는 사람은 주로 화를 쉽게 내게 되며, 인내를 잃어버립니다. 그게 저와 선배α과의 마찰 사이에서도 벌어졌던 일일 겁니다. 너무 가까이 있었다가, 너무 멀어지는 것, 그 간극을 메울 것은 분노와 상실뿐입니다.


같이 있는 것이 싫증이 난다면, 둘은 너무도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한 달에 한번 만나도 싫증 날 수도 있는데, 결국 그것마저 사이가 너무 가깝다고 느끼는 것이 이유라고, 그렇게 보아 왔습니다. 이는, 비단 지인과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가족, 애인 모두에 해당하는 겁니다. 외동아들이었던 저와 부모님의 관계에서도 같았습니다.


거리를 잘 조절하는 사람은 이렇게 긴 글을 읽지 않아도 스스로 조절하는 법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이번 해설집의 필자되는 제가 조절하는 법을 너무도 모른 나머지 맨땅에 헤딩하며 배운, 거리 조절법을 간단하게나마 써보겠습니다. 


먼저, 내가 친근감을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상대방이 실망하더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상대방과 내가 조금 서먹해지더라도, 오히려 서로를 위해 안정되게 마주 보는 일입니다.


둘째로, 빈번하게 사과하는 것을 좀 줄여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의존 적인 사람이 사과를 많이 하게 됩니다. 아쉬운 놈이 지는 법이라고, 아쉬운 사람 입장에서 멀어지는 것이 싫어 자꾸 가까이 가려는 것이 충돌을 빚게 되고 또 아쉬운 사람이 사과를 하는 겁니다.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보, 물질적 이득, 권위 감을 취하려고 가까이 가다가 충돌을 빚은 사람은 위의 충고와 전혀 다른 말이 필요합니다. 거리를 불순한 게 조절하는 사람에게 놓인 길은 잔잔하고 밝은 미래가 아니고, 스릴 넘치는 롤러코스터 같은 완벽한 무질서의 세계입니다. 좋게 말했는데, 인생에 싸움판만이 놓여있다는 얘깁니다. 주제와 벗어나지만, 오해하고 잘못 적용하여 상대방에게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으니까요.


세상을 이루는 원자도 우리처럼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항상 애쓰고 있습니다. 원자가 서로 가까우면 커지는 것을 반발력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명이 어째 너무 길으면서 짧은 것 같은데, 짧은 것 같은 생각은 제 욕심이고, 긴 것 같은 생각이 객관적일 테니 여기까지만 설명하겠습니다. 부디, 제 해설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도움이 되지 않으신 분들까지 만족하도록, 위로가 되는 말들 몇 자 적어보겠으니, 마저 읽어주시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분노에게 멱살을 잡히고, 들리어 지곤 쉬지 못하는 우리


응어리들이, 어두운 과거에서 걸러 낸 찌꺼기들이 배설되지 못하고 남아 삭아가고 있습니다. 같이 만들던 좋은 추억 그것의 적분 값이, 좋지 않은 사건이라는 상수 하나에 기억이란 좌표 공간 위 그려낼 곳 찾지 못하고, 그만 방안지 찢어버리고 맙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련만, 막아선 분노는 나를 질책하는 것인지, 상대방을 질책하는 것인지 모르는 큰 소리로 내 머리를 가득 채웁니다. 


화가 나면, 화에 휘둘려 마음속 나의 집의 가구를 다 부숴 놓으면, 남은 일은 부서진 집에서 웅크려 앉아 눈을 감는 겁니다. 그렇게는 안됩니다. 단단해야 할 내 집이 휘둘러지고 마구잡이로 내뻗는 우리네 상처만으로도 부서질 것이라면, 다 울고 나서 지친 우리의 눈 앞에 놓인 것이라곤 조각 난 집 그 잔해를 다시 맞추어야 할 먼 길 뿐 일 겁니다. 마음속 흉터 생긴 나를 보곤 고생을 겪어 가는 늠름한 어른이라고 생각할지, 그것을 볼 때마다 후회를 할지, 그것을 가리려 애쓰다 지쳐버릴지, 우리네 선택에 달린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못돼 먹은 것이라, 우리의 갑옷을 부수고 숨기던 흉터를 아프게 하려 들 테니, 우직하고 강인하게 가면 없이 우리 그저 흉터를 그대로 둡시다. 흉터는 비록 못생겼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내가 아름다운 것이니, 튼 손으로 일을 하시면서도 웃는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는 부모님, 가족처럼,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저 웃음이나 지어 봅시다. 그러고 나면, 우리 그때 비로소 우뚝 서는 겁니다. 단단해진 내 집 멋들어진 성이 되어 그 위에선 세상 멀리 경치 구경이나 하고, 분노 내려놓고 한 때 싸웠던 사람과의 추억 그 부분적인 기억만이라도 아름답게 남겨둡시다. 없으면 뒤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도 되니 또한 좋은 겁니다.


앞으로 모든 해설집에서 마무리로 하게 되는 간단한 실천 과제가 있습니다. 문제를 풀었으니, 숙제도 있는 거지만, 매번 비슷할 겁니다. 

스스로의 이름 뒤에 사랑해를 붙여 문장을 만드세요. 수식어 붙이면 닭살 돋으니 저는 딱 사랑한단 말만 합니다. 다하셨으면 진짜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그대로 말해주세요. 


별 변함없이 소름만 돋는다 하시는 분은 건강한 분이니, 어쩌면 이 글을 읽을 필요 없는 늠름한 어른이며, 저의 선생님일 겁니다. 다만,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지거나, 눈물이 날 것 같은 분은 제 학생분 되시는 거니까 다음에 올라올 글도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Photo by Banter Snaps on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