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절이 바뀐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느낄까). 캘린더를 넘기면서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느끼는 걸까, 아니면 날씨/기온이 변화하는 걸 느끼며 계절이 바뀌었다고 말하게 되는 걸까. 미국 달력은 아주 명확하고 단호하다. 한 나라지만 기후대가 서로 다를 만큼 넓은 땅덩이를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 Calendar에 따르면 지금은 가을이다. September를 펼치면 22일 날짜에 ‘Autumn Begins’라고 찍혀있고, Winter는 12월 21일에 시작되는 것으로 나와있다. 이 낯익은 날들의 정체는 각각 추분과 동지다. 그렇다면 봄과 여름의 시작이 언제일지도 뻔하게 알 수 있다.
연중 온화한 기후인 남가주에 사는 것을 꿈으로 여기는 미국인들이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와 날씨에 예민한 편인 나에게 남가주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계절, 겨울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라 할 만하다. 미국 남가주에 산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 계절 감성은 한국의 그것을 벗어버리지 못했나 보다. 달력에서 아무리 강력하게 주장해도 내 몸은 그 구분을 따르는 것에 저항한다. 눈에 보이는 계절의 빛깔도 내 뇌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 많이 달라 혼돈스럽다. 사실 그런 구분과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유년시절의 추억이 계절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토록 계절에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하고만 놀 줄 아는 요즘 아이들(우리 아이들)을 가여운 눈으로 바라보며 ‘라떼(는)’를 소환해 본다. 우리 집에 흑백 TV조차 없었던 초등학교(사실은 국민학교) 시절, 놀이란 집 앞 골목길이나 골목길 밖 너른 공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만)을 의미했다. 뾰족한 돌멩이로(간혹 길에서 주은 석필 조각으로) 땅바닥에 오징어 모양, 열십자 모양을 그려 놓고 얼마나 신나게 놀았던가. 무궁화 꽃도 정말 자주, 많이 피었고 우리 집에 왜 왔냐고 집단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장 흥을 냈던 것은 계절별로 특화된 놀이였다. 구슬놀이, 딱지치기, 팽이치기, 썰매 타기 등등. 지금 생각하면 계절과 관계없이 놀 수 있는 놀이도 있었는데 어떤 놀이는 굳이 특정 계절에만 놀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옛 추억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 것을 보면 가을이 오긴 왔나 보다. 한 해를 넷으로 나눈 계절로서도 그렇고 내 인생의 계절로 봐도 그렇다. 가을에 단풍이 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은 나무가 ‘스스로’ 수분 공급을 줄여 생기는 현상으로, 나무가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슬픈 눈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비록 몸뚱이는 쇠락해 가지만 한숨만을 내쉬며 정신줄을 놔야 할 이유도 없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빼앗기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지만, 스스로 미련을 버리고 내려놓는 것은 승리의 감정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것을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서니 산책길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희뿌연 안개비가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공기 중에 미세한 물방울이 떠돌아다니는 정도로). 인적이 드문 산책로를 따라 분위기에 취해 걷는데 엊그제 페이스북에 남가주의 가을을 폄하(?)하는 포스팅을 올렸던 것이 생각났다. '부스스한 빛깔의 마른 이파리들만 흩날리고 거리를 나뒹군다'라고 했었던가. 어쩌자고 그런 망언을 늘어놓았었던가. 가을에 무슨 스탠더드가 있다고. 아니다. 정정한다. 한국이나 미국 동부에서 볼 수 있는 형형색색의 단풍은 아니지만 보슬비에 젖은 누런 이파리들이 뿌려져 있는 11월의 남가주 가을도 나름 멋지고 분위기가 있다. 추억과 상념에 빠져들기에 충분한 가을 감성을 느꼈다는 것이 그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