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에서 초록으로 가는 길, 혹은 그 반대
내가 초록색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몇 해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파란색을 제일 좋아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깊고 푸른 바닷속처럼 먹물을 살짝 풀어놓은 듯 어두우면서도 은은하게 빛이 나는 신비로운 파랑. 머릿속에서는 수백 번도 더 바라보았지만 그 색을 실제로 마주한 적이 있었나 싶다. 어쩌면 환상인가?
팬톤(PANTONE)이 매년 올해의 색을 발표하듯 나도 해마다 작업에 쓸 주요한 색상을 정하곤 하는데 몇 해 동안이나 ‘파랑'이 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파랑에서 출발해서 파랑으로 도착하는 길은 험난했고, 작업 안에서 난 늘 어느샌가 샛길로 빠져 초록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의 공간을 둘러보니 내가 가진 물건들은 대부분 초록색이고 그림에서도 그 색을 가장 많이 쓰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내 곁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색이라 많아진 걸까, 아니면 그 색에 둘러싸이다 보니 좋아진 걸까. 작업할 때도 초록색 계열을 쓰고 있을 때 마음이 가장 평화롭다. 색을 마주 하고 있는 그 순간들이 내겐 사색의 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