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동두천 양공주 출신의 소영(윤 여정 분)이 성매매 과정에서 만난 노인들의 자살을 돕게 되는 이야기이다.
소영의 시각으로 흘러가는 영화임에도 자꾸만 소영을 찾는 노인들의 시점으로 따라가게 되는 것은 같은 남자라는 이해심과 늙음이라는 것이 나와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 까닭인지 모르겠다.
이야기는 내 노년의 마지막이 초라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시선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소설 <오베라는 남자>와 비키쿤켈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떠올리게도 한다.
누군가는 소영을 일본 동북지역의 무당에 비유한다. 이 지역의 무당은 장애인과 같은 약자들이라는 거다. 이런 약자들이 쉽게 타인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들을 찾는 사람들도 보다 편하게 자기를 열게 된다고 한다.
노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할 장소를 찾아 소영에게로 온다. 그리고, 그 욕망을 해결하려는 노인들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만 관심을 가지고 해결 방식도 오직 자기를 기준점으로 한다. 소영의 불편에는 아랑곳없지만 그것은 나중의 화대로 충분히 지불된다고 생각한다.
중풍으로 쓰러진 노인, 치매로 기억을 잃는 노인, 노년의 고독으로 절망하는 노인들은 다시 소영을 찾는다. 욕망의 해소처를 찾던 노인들은 이제 절망을 해소할 장소를 찾는다. 그리고, 그 해소하는 방법과 만남의 양상은 그들이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만났던 모양새를 다시 한 번 되풀이 한다. 노인들은 자기 기준의 절망 해소 방법만을 찾을 뿐이다.
각가의 성적 취향을 보였던 것과 같이 노인들의 자살 방법 또한 각자의 취향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성매매와 자살의 상이한 취향들은 소영에게 하나의 그릇으로 수렴된다.
욕망을 찾아 소영에게 무릎을 꿇었던 노인들이나 절망의 해소를 위해서 자살을 찾은 누구도 소영을 자신의 집으로 들이지는 않는다. 욕망이 해결되고 난 이후 아무일 없었던 듯 자신의 원래 길을 걸어갔던 것처럼 노인들은 절망이 해소된 후 다시 자신의 길을 걷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에 양공주가 되어 버림받고 흑인 미군의 아들을 낳아 입양을 보낸 소영은 대부분의 삶이 절망이었던 듯 보인다. 소영은 딱히 이러한 절망을 벗어나려하거나 해소의 방법을 찾는 듯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수다스럽거나 격하게 감정적이지도 않다. 어쩌면 소영은 인생 대부분인 절망의 시간을 애도의 시간으로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소영의 본명인 양미숙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소영은 <오베라는 남자>의 소설속 오베와 같은 선택-결국 스스로도 죽여주는 여자-을 한 것이 틀림없다. 소영에 대한 미숙의 애도를 모두 마감하고서 말이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밀란쿤데라<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