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arl K Jun 07. 2024

무심한 환대의 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20년 넘게 일을 하면서 많은 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숨을 크게 쉬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일할 때는 일하고, 친목을 다질 때는 확실히 노는 편이었다. 세 번째 회사에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현장이었다. 네 번째 회사는 겉으로는 친절했지만 각자 겉과는 다른 생각을 내면에 품고 있었다.


   학교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가졌었다. 적어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니까 구성원들이 서로를 조금은 더 성숙하게 배려해 주는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모범이 되지 않고 가르치는 건 그저 허무한 공염불일 뿐일 테니까. 나의 바람은 이상일뿐이었고 지난 시간 동안 그 기대는 완벽하게 배신당해 왔다. 


   사실은 내가 너무 순진하고 사람을 잘 믿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을 향한 믿음을 포기할 순 없었다. 매번 새로운 학교에서 일을 시작할 때마다 ‘혹시’ 하는 기대는 ‘역시’ 하는 실망감으로 무너졌다.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물론 그런 시간들 속에서도 정말 소수지만 소중한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힘든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고마운 이들에게 기대어 어려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코로나 전후로 인간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었던 그때, 나는 더 이상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은 다음부터는 더 이상 그렇게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실제 노래는 잘 모르지만 나훈아 씨의 노래 가사인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가 너무도 절절한 외침으로 들렸으니까. 


   작년에 근무했던 곳은 종교재단의 사립학교였는데, 조금은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 그래도 상식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최소한의 상식조차 없다는 걸 알았다. 눈앞의 상황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본질이란 더욱더 믿을 수 없다는 사실만을 뼈아프게 배우기도 했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모든 관계는 영원할 수 없고 나의 기대가 언제나 상대방의 생각과 같을 수는 없는 거니까. 각자의 삶의 흐름 가운데 만나서 함께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다면 그 시간에 충실하고,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멀어진다 해도 그뿐이다. 그렇게 모든 기대와 사람은 이래야만 한다는 나의 기준을 버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직업적 특성상 몇 년에 한 번씩은 계속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 앞에 놓이게 되는데, 덕분에 인간을 기대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일을 하고,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 해내고, 아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따스함을 건넬 뿐, 그 외의 것들에 마음을 닫았다. 그게 내가 나로 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 새로운 학교로 이동한 후 첫 부서 회식이 있었다. 심정적으로는 거의 7년 만에 부담스럽지 않고 마음이 편안한 시간이었다. 어느 곳이나 그렇지만 여기에도 이상한 갑질하는 한 분은 계시고 그것 때문에 다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반대로 각 구성원들의 소중함을 모두가 공감하는 지점이 있었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챙기는 서로를 향한 무심한 환대와 배려가 정말 고맙게 느껴졌다. 


   최근 몇 주간 아이들의 거짓말 때문에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들이 생겼는데, 선을 많이 넘은 학생 때문에 어려운 마음이 많이 들었었다. 그 사건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난 후 여러 사건이 있던 아이들 학년의 담임선생님들께서 별실에 계신 선생님들이 너무 애쓰신다며 마음을 모아 각 별실마다 간식을 전달해 주셨다.


   또 행사를 준비하면서 업무 특성상 혼자 하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담당 부장님이 말이라도, 한 손이라도 거들어 주셨던 기억도 8~9년만 인 것 같다. 한두 분 정도가 마음을 쓰며 격려해 주신 일은 있지만, 이런 식으로 받는 환대는 처음이라 상처받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잡았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리며 뭉클해지고 말았다. 


   그동안 내가 기다렸던 건 그저 이 정도의 소소한 마음이었다. 애써 챙겨주려 하거나, 간단히 무시해버리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것. 타인의 업무에 대해 함부로 폄훼하지 않고, 나의 일이 힘든 만큼 타인의 일도 어렵다는 이해를 갖는 것. 마주치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잠깐의 격려를 나누는 일.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나누는 것 말이다.


   올해는 처음으로 마음 맞는 분들과 같이 독서 모임도 하고 있다. 아무래도 경험이 없어 살짝 두려웠는데, 좋은 시간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또 전에 함께 근무했다가 15년 만에 재회한 샘은 모르는 것 있으면 다 물어보라며,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을 주시고 계신다. 그래서 아주 든든하고 힘이 된다. 


   모두가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하고, 협조를 요청하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해 주시는 곳이라는 생각에 오랜만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얼마 만에 느끼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인가 싶다.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모르지만 일단 지금의 시간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참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유 모를 혐오와 비난, 멈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