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슈퍼엔 낭만이 있으니까.
나는 대형 마트에 잘 가지 않는다. 1년에 한두 번을 갈까 말까 하는 정도이다. 아무래도 혼자 살다 보니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어쩌다 대형마트에 가게 되더라도 필요한 것만 사서 서둘러 돌아오게 된다. 오랜 시간 마트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셋째 동생과 함께 살 때 셋째는 나에게 마트에 가자고 조르곤 했다. 대여섯 번을 조르면 나는 마지못해 대형 마트에 갔다. 대형 마트에 가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사게 되었다. 그렇게 많이 사지 않은 것 같은데도 영수증엔 10만 원 이상의 금액이 매번 찍혔다.
집 앞 슈퍼에는 가게 앞에 아이스크림 냉동고들이 줄줄이 놓여있다. 한 여름 저녁, 퇴근을 하고 강아지들과 산책을 할 때 슈퍼 앞을 지나면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냉동고 앞에 서서 각자 먹을 아이스크림을 신중히 고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강아지들과의 산책을 나갈 때 나는 부러 카드를 챙겨나간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강아지들과 함께 가게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 냉동고 앞에 서서 그 아이들처럼 아이스크림 하나를 고른다.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대형마트처럼 대용량의 아이스크림을 싸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실에 앉아 집 앞 슈퍼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으면 어째서인지 행복해지는 것이다.
우리 시골 마을에는 슈퍼가 없었다. 한 시간을 걸어 나가야만 과자를 사 먹을 수 있었다. 과자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명절에 선물로 들어오는 종합과자 선물세트는 할머니의 장롱 깊숙이 숨겨져 있었고, 어째서인지 할머니는 우리에게 쉽게 과자를 주지 않았다. 또 다른 기회는 한 달에 한번 생필품을 실은 만물트럭이 올 때였다. 만물트럭에는 정말 없는 것이 없었다.
동네에 트로트가 울려 퍼지면 만물트럭이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만물트럭은 동네 어귀에 주차를 하고 이내 사장님이 미리 녹음한 안내멘트를 틀었다. ‘호미 있어요~! 밀가리도 있어요~! 몸빼 있어요~!’ 하는 그런 안내 멘트는 리드미컬하게, 또 우렁차게 동네를 흔들었다. 만물트럭이 언제 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트럭이 오면 트럭이 왔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면 나는 부리나케 할아버지 방으로 뛰어 들어가 할아버지를 깨웠다.
“할배! 할배! 과자 사줘! 빨리 일어나아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할아버지를 깨웠다. 트럭이 언제 가버릴지 모를 일이라 나는 속이 타들어갔다. 급기야 할아버지 귀에 대고 바락 소리를 질렀다.
“할배! 일나라! 쫌! 아저씨 간다아아!”
내가 사정없이 소리를 지르면 할아버지는 일어나 앉아 마른세수를 하고 “하, 고년 참. 가자. 가보자” 하며 고무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로 발을 끌며 나와 함께 트럭이 주차되어있는 동네 어귀로 향했다.
키가 닿지 않았지만, 내 작은 키로 트럭 화물칸에 실린 물건들이 다 보이지도 않았지만 나는 기를 쓰고 까치발을 하고 주렁주렁 달린 냄비며, 호미, 알록달록한 몸빼를 구경했다. 만물트럭 사장님과 인사말을 주고받은 할아버지는 라면 한 박스와 필요한 물건들과 내가 먹을 과자를 사 라면박스는 옆구리에 끼고, 검은 봉지에 담긴 나머지 물건들은 다른 한 손에 달랑달랑 들고 돌아섰다. 나는 할아버지가 사준 과자를 입안에 넣고 녹여 먹으며 만족한 얼굴로 할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면 소재지에 있는 슈퍼에서는 버스표를 팔았다. 버스표에는 목적지에 따라 요금이 찍혀 있었다. 버스표에 요금이 찍혀 있지 않으면 사장님은 느릿느릿 손에 침을 묻혀 버스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도장을 찍었다. 버스 요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여름엔 하드를 사 먹었고, 겨울에는 슈퍼 중앙에 있는 난로에 대롱대롱 걸려있는, 따듯하게 데워진 병 베지밀을 사 먹었다. 장날이면 할아버지는 슈퍼에 앉아 학교가 끝나고 버스를 타러 오는 우리를 기다렸다. 버스가 올 시간이 되면 할아버지는 나에게 미리 사서 가게 냉동고에 넣어놓은, 검은 봉지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꺼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장날마다 읍내에서 술을 드시고 큰 목소리로 슈퍼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러워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도 할아버지가 미리 사둔 아이스크림 봉지를 냉동고에서 꺼내면 나는 슬쩍 웃음이 났다. 할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게 싫다가도 우리를 위해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잊지 않으시는 것에 나는 어쩐지 만물트럭이 생각이 나는 것이다.
만물트럭에서 산 과자를 아껴가며 먹고 있노라면 어느새 만물트럭에서는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이제 곧 만물트럭이 우리 동네를 떠난다는 신호였다.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라면을 끓였다. 나는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할아버지가 끓인 라면을 먹었고, 할아버지는 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드셨다.
“할배, 할배가 끓여주는 라면이 젤 맛있다!” 콧물을 훌쩍이며 내가 말하면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그릇에 있는 면을 덜어주셨다.
집 앞 슈퍼는 배달은 하지 않는다. 달리기를 하고 나면 나는 항상 이온음료 한 잔을 마시는데, 슈퍼에 갈 때마다 한 두병씩 사 온다. 굳이 한 박스씩 사서 집에 둘 필요가 없다. 이온음료가 떨어지면 달리기를 마치고 슈퍼에서 한 병을 사 오면 되니까. 슈퍼에 없는 것들, 이를테면 강아지 사료 등은 인터넷으로 구매를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들은 되도록 슈퍼에서 사게 된다. 두루마리 화장지와 갑 티슈, 면봉, 수세미, 고무장갑 등 내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 대다수가 구비되어 있다. 물론 종류가 다양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제철 과일들은 슈퍼 한쪽 매대 위 빨간 바구니에 몇 개씩 담겨 놓여있다. 이따금 나는 그 앞에 한참을 서서 신중히 과일을 고른다. 물론 차를 몰고 15분쯤 가면 있는 대형마트에는 더 다양한 과일이 있겠지만, 대용량으로 사면 훨씬 저렴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많은 과일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대형 마트보다 동네 슈퍼가 더 낭만이 있으니까. 낭만이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낭만은 지루한 일상을 조금 더 의미있게 해 주니까. 이런 낭만 가득한 동네 슈퍼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동네 슈퍼를 애용한다.
몇 년 전, 엄마의 심부름으로 옛날 그 슈퍼를 방문했다. 여전히 카운터에 한쪽에는 버스표 뭉치가 있었다. 버스표 옆에는 요금을 찍는 도장도 함께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시간은 그곳에 멈춰있었다. 버스를 탈 일은 없지만 버스표 한 장을 사고 싶었다. 어쩐지 할아버지가 미리 사둔 아이스크림들이 검은 봉지에 담겨 가게 냉동고에 들어있을 것만 같은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역시, 동네 슈퍼에는 낭만이 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