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창호 / 종달리 이장
사고
종달리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종달초등학교 관리인, 옛날 말로는 소사였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선배와 같이 목수 일을 도우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열아홉이 되던 해입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재료를 사러 갔다 오는 길에 사고가 났습니다.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선배 형님은 현장에서 돌아가신, 큰 사고였습니다. 뒤에 탔던 나도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가 계속됐다고 합니다.
깨어나 보니 두 달 만에 살아난 거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했지만 지금도 내 몸은 정상이 아닙니다. 목에는 산소호흡했던 흔적이 패어있습니다. 머리뼈도 일부 없습니다. 마비됐던 왼쪽 몸에는 지금도 후유증이 남아있습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보상을 받을 수도 없는 사고였습니다. 오랜 기간 병원비에 치료비에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십시일반 도와주었습니다. 동네 선배들이 나를 위해 모금 활동도 했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죽을 목숨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많은 분의 도움 덕분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뭔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나도 비록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지만 주변에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나름대로 은혜 갚음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버지도 비록 가난한 학교 관리인이었지만 항상 남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내가 먹을 게 없어도 남이 굶고 있으면 남에게 주는 것이 먼저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거리로 나갔습니다. 무엇을 할까 하다가 나처럼 불행한 사고가 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하교 시간에 버스정류장에서 교통정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버스가 오면 특히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혼잡하고 위험했습니다. 내가 미리 가서 오는 순서대로 줄을 세웠습니다. 20살 때부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1984년 제주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전 당시의 일입니다. 제주도 버스에는 안내양이 없었는데 그때 처음 대구에서 안내양들이 파견됐습니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제주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학생들 줄을 세우고 요금을 받아주고 시내까지 같이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다 정작 다시 돌아올 때는 차비가 없었습니다. 바보 같은 일일 수도 있지만 해야 할 일이라고 감수했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번은 버스 기사와 말싸움이 붙었습니다. 지나가던 동네 어른이 ‘유별난 짓을 해서 저렇게 욕을 먹는다’고 말하면서 지나치더라고요. 말이라도 좋은 일을 한다고 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섭섭했습니다. 그때부터 남이 어떤 일을 하는 걸 보면 무조건 ‘수고한다’, ‘힘내라’ 말하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그렇게 섭섭한 일이 있어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동네 어른 말마따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유별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종달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창설되자 나서서 축구를 가르쳤습니다. 무슨 자격이냐면 동네 선배 자격이라고 하면서 코치 역할을 한 겁니다. 아이들과 함께 뛰면서 마라톤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못 달리냐고 놀렸습니다. 사고 후유증으로 다리가 좀 불편하거든요. 그래도 끝까지 완주하곤 했습니다.
리사무소는 마을문고였습니다. 하교 후에 아이들이 자율학습을 하러 왔습니다. 저녁에 아이들을 관리하며 방범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옆에서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싶었습니다.
소소한 역사
우리 마을은 8백 년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처음 생성된 것은 저 안카름이란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이쪽으로 이주한 지는 6백 년이 됩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이라는 종달리 패총단지는 윗 도로가 개설되면서 흩어져버렸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우리 집이 그 인근에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땅을 막 파고 있는 겁니다. 육지에서 온 사람이라는데 땅속에서 소라껍데기를 캐더니 큰 가마니에 담아서 가는 겁니다. 자개가 많이 쓰이던 시절이라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게 패총이라는 유물이라고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지금 패총단지가 흔적만 남을 걸 보면 역사를 전달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종달리는 5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됐습니다. 각 부락에 상여집이 있고 꽃상여가 있었습니다. 내가 스무 살 무렵에 친구가 젊은 나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때 친구들이 모여서 꽃상여를 꾸미고 꽃상여놀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벌써 3, 40년 전인데 그게 마지막 꽃상여놀이였던 것 같습니다. 상여는 25년 전까지는 사용했는데 요즘은 상여틀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겁니다. 나도 모릅니다. 어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배워두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마을 구석구석을 다 기억하고 싶습니다. 소소할지 몰라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초등학교에 관사와 우물, 범못, 예전 쌀집 자리, 가장 먼저 생긴 가게, 종달리 1호 빵집 등 예전부터 지금까지의 작은 변화 모습도 기록해서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장이 되고 나서
2019년 이장이 됐습니다. 주민투표로 이장을 정하는데 내가 선뜻 나섰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땅 부쳐 먹는 가난한 사람이지만 원래 어렵게 사는 사람이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나섰습니다. 봉사 하나는 젊어서부터 이력이 붙어 잘할 거라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이장이 되고 보니 마을에 대해 생각이 많습니다.
우리 마을은 동네 길들이 좁은 편입니다. 어떤 주민들은 넓은 길을 원합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마을 안길 만큼은 아기자기한 맛이 나야 한다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마을의 변화는 천천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열린 생각으로 이주민들도 마을개발위원으로 참여시키고 싶습니다. 같이 사는 마을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작은 변화에서 마을 사람들이 행복하고 활짝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이 있는 환한 마을, 내가 만들고 싶은 종달리의 모습입니다.
발행처 ㈜제주착한여행 / 인터뷰·정리 권영옥 / 사진 지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