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근 / 한학자
서당에서
어렸을 때 살던 곳은 ‘굴왓’이라 부르는 세화3동입니다. 내가 1938년생인데 5살을 넘기자 같이 살던 할아버지가 한자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할아버지는 대단한 분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단발령이 내려졌는데도 할아버지는 끝끝내 상투를 자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상투 할아버지’라고들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꽤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자 할아버지는 마을에 서당을 만들고 스승님을 정해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공부하게 해주었습니다.
한문 공부는 ‘천자문’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동몽선습’, ‘계몽편’, ‘명심보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말해도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를 겁니다. 소반 같은 거 하나 하고 붓을 가지고 서당으로 갑니다. 그러면 훈장님이 한 글자를 써줍니다. 그러면 오전 내내 그 위에 내 손으로 다시 써보는 겁니다. 글씨 위에 쓰고 또 쓰고 그렇게 쓰다 보면 눈을 감고서도 글을 씁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것은 아주 가는 붓으로 엄지손톱에 거북 귀자를 아홉 번 쓰고 그게 익숙해지면 열두 번 씁니다. 알지요? 거북 귀자는 복잡하고 획수도 많지만 그걸 작은 손톱에 그렇게 쓰는 게 가능해집니다. 그렇다고 붓이 좋기나 하나요. 돼지를 추렴할 때 목덜미 털로 붓을 만들어서 그걸로 썼으니, 정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공부가 하고 싶어
할아버지 밑에서 서당에 다니던 시기를 거쳐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때는 이 마을에도 초등학교가 있었어요.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에 7남매나 되다 보니 상급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도 한문 공부를 중요시했을 뿐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절반 이상이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부럽고 오기가 났습니다. 우연히 통신교육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한영중고등학교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방송통신학교에 해당됩니다. 편지로 접수하고 강의록으로 공부했습니다.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치는 데 5년이 걸리더군요. 그렇게 어렵게 공부를 했지만, 공부에 대한 미련은 아직도 남습니다.
살아오면서 어려서 한문 공부한 덕을 보긴 했습니다. 해병대 복무 시절입니다. 훈련병 때를 제외하고는 무기를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총 대신 펜을 잡았다고 할까요. 주로 공문서를 쓰거나 상장을 쓰는 일을 맡아 하는 행정병으로 지냈습니다. 철필로 원지를 긁어서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안 쓰는 일본말인데 ‘가리방’이라고 하지요. 3년 내내 그것만 긁었으니 글자 하나는 인정받은 셈이지요.
집을 짓다
제대를 하고 2년쯤 후의 일입니다. 1963년입니다. 그해 엄청난 흉년이 들었습니다. 보릿고개 흉년이라고들 하지요. 나는 군대 가기 전에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들까지 둔 가장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먹여야 하는데 먹일 게 없는 겁니다. 사료로 쓰는 강냉이를 맷돌에 갈아서 밥을 해줬습니다. 껍질도 다 벗겨지지 않은 강냉이밥입니다. 그때는 왜 그리 사는 게 힘겨운지 먹고 사는 걸 모두 이 한 몸으로 해결했습니다. 생각해보니 흉년이 난 그해부터 이 집에 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돈으로 천원을 주고 산 집입니다. 천원이라면 큰돈이었지만 집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초가였습니다. 어디가 부서져 수리하기가 바빴습니다. 다른 제주의 집들처럼 초가였던 집을 돌집으로 완성했습니다. 1976년 39살, 그제야 번듯한 내 집을 가진 심정이었습니다.
풍수지리를 배운 사연
먹고 살기가 바쁘다 보니 한문을 자주 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나마 집을 지을 때 상량문을 쓴다거나 아이들 결혼할 때 사주를 쓰는 정도였습니다. 딸을 결혼시킬 때는 내가 직접 사주를 썼지만, 아들을 결혼시키려니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때 떠오른 어른이 정남휴 어르신입니다. 1916년생인 어르신은 나와는 12촌 형제 사이인데 성균관 진사를 지냈습니다. 축지법을 사용했다는 말도 있는 기인입니다. 그 어르신에게 문중의 일을 보는 것, 묘제에 참석해서 하는 일 등을 배우게 됐습니다. 특히 ‘주역’에 통달한 분이고 풍수지리에 능통했습니다. 17년 넘게 산으로 들로 쫓아다니며 배웠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자식의 이사나 마을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나에게 의논을 합니다. 택일을 하거나 방위를 정해주거나 위패를 써주거나 하는 일을 하는 거지요.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건 도리가 아니지요.
다시 학문
나에게는 남휴 어르신 물려준 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현리경’이라는 제목이 달린 책인데 남휴 어르신 직접 엮어 만든 책입니다. 그 책을 복사해서 한 권 간직하고 있었지요. 묘지보는 법, 택일하는 법, 양택인지, 음택인지,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담아둔 책입니다. 2007년에 나이 들어 제주대 평생교육원 유학지도자 과정을 듣게 됐습니다. 그때도 ‘현리경’을 갖고 다니며 읽곤 했는데 지도자 과정의 교수가 보더니 책을 좀 빌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좋은 책 같다면서 복사해서 원생들에게 한 권씩 선물하고 싶다고요. 흔쾌히 그러라고 했는데 그 과정을 마친 45명 중에서 이 책에 관심을 두거나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쉽더군요.
그 해에 향교와 인연을 맺고 아헌관 역할까지 해봤습니다. 그리고 성균관과도 연결되어 2016년에는 성균관전의라는 품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를 연속 3년 채웠는데 그렇게 성균관전의를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물론 내 돈 들이고 서울의 성균관까지 드나드는 일이지만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매 한 마리 마주 보며
나는 지금도 서예를 열심히 합니다. 천자문도 몇 번이고 씁니다. 서예로 이런저런 상을 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만 같습니다. 나는 이 촌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어디 가서 허술하게 굴지는 않습니다. 속이 단단한 사람은 사는 것이 어디든 꿇릴 게 없습니다.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뒤쳐지지 않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략’에 들어간 내용이 튀어나오거나 천하의 문장이 등장하고 이태백이나 진시황의 역사가 나오더라도 그 속에 담긴 문장을 하나하나 말할 수 있습니다. 학식이 그들보다 높아서가 아닙니다. 어렸을 때 배운 것이 번쩍 떠오르는 겁니다. 한문도 서예도 풍수지리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지만 내 인생은 그것들이 있기에 단단합니다. 사람들은 후학을 키우지 않느냐고 물어옵니다. 배움이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배우려고 해야 배울 수 있는 겁니다. 요즘은 배우려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내 방 창문으로는 매오름이 가득 들어찹니다. 매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편듯한 형상입니다. 명당이 따로 없습니다. 거대한 매 한 마리 마주 보며 살아갑니다.
발행처 ㈜제주착한여행 / 인터뷰·정리 권영옥 / 사진 지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