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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홍 Dec 02. 2016

장갑

매일 타는 지하철에는 끝이 없다. 노선도가 너무 크고 복잡하여 민원이 들어오자, 지하철 회사는 노선도를 비공개로 돌려버렸다.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대부분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억과 질문에 의존해 노선을 찾기 시작했고, 곧 객차는 선교자와 장사꾼, 맹인과 앉은뱅이가 지배하는 공간이 되었다. 자리가 적당히 가득 찬 어느 날, 더운 날씨에 회색 재킷을 입은 한 중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복성이라고 합니다. 저는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실은 얼마 전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여기 계신 여러분들과 별다를 바 없는 처지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의 길을 잃지 않았습니까? 노선도조차 제공되지 않는 이 지하철에 몸을 실은 이상 그 누가 자신의 길을 명확히 알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한낱 덧없는 것이며 어쩌면 길을 찾아갈 가치조차 없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수많은 거지를 보았습니다. 사람이 많은 길에서, 죽었음이 분명함에도 하루가 넘게 방치된 어느 노숙자를 보았습니다. 술 취한 젊은이와 시비가 붙어 가혹하게 맞는 집 없는 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하철을 타기 전 화장실에 들렀다가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보았습니다. 거울 속의 그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저들에 비해 나은 것이 무엇인가. 저는 길을 찾고 싶습니다. 아무도 종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이 지하철만큼이나 깊은 방황에,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발을 들였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서며 어제와 다른, 혹은 같은 옷을 입고 길을 나서지만, 정말로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목적을 잃은 채 길을 나서며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저 삶의 가혹함에 살을 가리기 위해 무엇인가를 걸치기만 하고 매일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지하철은 언제 정차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 없는 삶도 어디로 이어질지, 얼마나 춥고 혹독한 곳으로 우리를 이끌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어둠으로 가득한 여정에 길을 더듬을 손이 얼어붙지 않도록, 이 방한 장갑을 한 켤레 단돈 오천 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목적이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지하철은 멈추지 않는 여정을 계속했다. 차량은 터널로 들어섰으며, 안정적이지 않은 전원 공급으로 전등은 점멸을 반복했다. 두어 명인가는 손을 들어 싸구려 소재로 만들어진 장갑을 구매했고, 창밖은 끝없는 터널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자는 끝없이 다음 칸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했으며, 그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했고, 장갑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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