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한 끼가 뭐라고. 혼행자는 서럽다.
너 참 신기하다. 근데 나도 신기해?
아르바트거리에는 잔뜩 이국적이지만 딱히 고풍스럽지는 않은 세트장 같은 건물이 즐비했다. 누가 봐도 K-관광객인 나는 그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야만 했고, 야심 차게 챙겨 온 삼각대와 핸드폰 카메라용 블루투스 리모컨을 꺼내 들었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찍힌 샷’을 매우 의도하며 리모컨을 연신 눌렀다. 이런 사진은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는 무심한 시선처리가 생명인데, ‘혹시 누군가 삼각대와 핸드폰을 홀랑 들고 가진 않을까?’ 속으로 전전긍긍했고 역시나 그 표정은 사진에 그대로 찍혀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거리는 점심 식사를 위해 나온 한국인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아르바트거리에는 큰길을 따라 분수가 차례로 몇 개 놓여있고, 분수 앞 벤치에서 휴식을 즐기는 동네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를 포함한 관광객들은 굳이 이 거리에 나와 쉬고 있는 동네 주민들을 신기하게 구경했고, 또 그들은 굳이 그 길가에서 사진을 찍는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너 참 신기하다. 근데 혹시 나도 신기해? 하는 표정으로.
제대로 된 한 끼에 대한 부담감
어느새 배가 고팠다.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니 여행을 시작한 후로 제대로 된 한 끼를 아직 먹지 못했다. 공항에선 버거킹, 도착해선 감자칩, 아침은 씨리얼이었다. 내 여행 테마에 궁상은 없었는데. 안 되겠다. ‘제대로 된 한 끼’ 정돈 먹어야겠다는 부담감에 휩싸였다.(여행을 갈 때마다 은근히 느끼는 부담감이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대체 왜일까?) 가이드북에서 보았던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핫한 레스토랑’이라는 수프라(Супра)에 가기로 했다. 이미 수차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어 대기 시간이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제대로 된 한 끼 미션을 클리어 해야 했기 때문에 그곳에 가야 했다. 분명 이번 여행은 핫플레이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했지만, 사람은 역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운이 좋게도 대기 없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그런데 웬걸? 내 자리는 루프탑에 있었다. 물론 전망이야 끝내주지만 8월의 땡볕이 그대로 내리쬐고 있었다. 이미 지친 혼행자에게 루프탑의 전망이 다 무슨 소용이랴.
‘멋진 전망과 요리를 한 프레임에 담는다면, SNS용으로 아주 적합한 사진을 건질 수 있을 거야’라는 소리가 내적자아A에서 튀어나왔다가, 이내 ‘무슨 소리야! 전망 좋은 에어프라이어가 있다면 그 안에서 밥먹을래?’라며 내적자아B에게 호통을 들었다. 결국 아래층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느냐고 물었고, ‘좋아, 하지만 꽤 기다려야 할 거야’라는 답변을 들었다. 네네네! 괜찮습니다. 에어컨 바람이 있는 곳이라면요!
그리고 그렇게 나는 망부석이 되었다. 생각보다 더 인기가 많은 레스토랑이었고 약 한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기다림에 지쳐버린 나는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웨이터가 공짜 사과와 와인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사과는 뜻밖에도 달았고 짜증이 눈 녹듯 수그러들었다. (제가 이렇게 다루기 쉽습니다)
‘다른 레스토랑에 갔더라면’하는 가정이, ‘에라이, 그냥 루프탑에 있을걸’하는 자책을 지나, ‘혹시 동양인이어서 나만 기다리게 하나?’하는 의심을 넘어 결국 ‘공짜 사과는 달다’에 도착했다.
사과를 나눠 주는 타이밍이 어찌나 절묘한지, 사장님은 혹시 심리학을 전공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한 시간 이십 분 만에 자리를 잡았고, 한 가지 메뉴로는 왠지 억울할 것 같아 다 먹지도 못할 세 가지 메뉴를 주문했다. (사장님은 심리학을 전공한 것이 아닐까?22) 여기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어디 한 번 먹어보자. 치즈가 듬뿍 들어간 피자와 비슷한 ‘하차푸리’와, 새우와 돼지고기가 각각 들어간 만두를 주문했다.
온갖 극찬이 가득했던 하차푸리는 맛있지만 놀랄 만한 맛은 아니었고, 만두에는 예상치 못한 고수가 들어있어 아예 먹지 못했다. 제대로 된 한 끼를 위해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이고도 실패하다니. 갑자기 혼행의 서러움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여행자들은 대기 시간 중에도 즐거워 보였다. 레스토랑 구석의 예쁜 곳을 찾아 작은 소품을 구경하고, 서로의 사진을 찍으며 웃음 가득했다. 나에게 대기시간은 버리는 시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또 다른 추억이었다. 내가 또 여행이 아니라 미션을 하고 있구나. 쓸데없이 집착하고 있구나. 이게 아닌데. 점심 한 끼가 뭐라고 기분이 다운될 일이냔 말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블라디보스톡에서 단연 커피 맛이 좋다고 하는 ‘카페마’(Kafema) 를 찾아갔다. 소문대로 원두가 종류별로 준비되어 있고 핸드드립으로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려주는, 제대로 된 카페였다. 관광객으로 가득 찬 다른 카페들과 달리 이곳은 조금 덜 알려졌는지, 나 외에는 모두 파란 눈의 러시아인뿐이었다.
때는 8월의 한여름. 음료 주문 전 굳이 메뉴를 볼 필요가 없다. 나는 ‘여름에는 반드시 1일 2*아아를 마셔야 한다’라고 DNA에 새겨져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아이스커피를 커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로마에서 로마의 법을 따르기엔 나는 너무 더웠다. 얼음 동동 아아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없는 여름 여행이라면, 그것은 고행이 아닌가.
메뉴에는 없지만 ‘아메리카노 위드 아이스’를 요청했다. 주문 받던 바리스타의 얼굴에 무시하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기분 탓이려니 넘기고 자리에 앉아 카페 인테리어를 구경했다. 시간이 흐르고 카페 안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못해 내가 화분 속 이파리의 잎맥까지 관찰 중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나보다 나중에 온 손님들의 메뉴는 이미 나온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학창시절 카페 아르바이트를 오래 했던 탓에 웬만하면 카페에서는 컴플레인 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육체노동 외에 서비스 정신까지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너무하지 않았나. 지금 얼음을 얼리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바리스타는 커피를 내리는 대신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다음 일정을 위해서 신념은 잠시 접어두고, 정중히 “제 커피는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지금 바로 주겠다고 서둘렀다.
아직 잘 모르겠다. 이것은 인종차별이었을까? 커피에 얼음을 넣어 먹는 사람에 대한 무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잊어버린 걸까. 후자라고 믿지만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이 계속 생각나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