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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ut peach May 26. 2019

블라디보스톡에서 #납작복숭아 찾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만난 납작복숭아

꿀 맛, 꿀의 맛


꿀맛이란 무엇일까? 꿀맛은 꿀의 맛이어야 하지만, 과장하여 말하기를 좋아하여 대리도 되기 전에 ‘강 과장’ 이라고 불리고 있는 나는 ‘존맛’이라거나 ‘꿀맛’이라는 단어를 오용하고 있다. 


사실 꿀을 일상에서 접할 일은 매우 적은데, 내 기억 속 꿀맛은 여덟 살 때 가족끼리 지리산 등반 중 먹은 것으로 대표된다. 길거리에서 할머니들이 나무젓가락에 꿀을 돌돌 말아 팔았는데, 등산으로 지친 내게 그것은 정말로 꿀맛이었다. 


그런데 얼마전 그 꿀에 대해 엄마에게 말했더니, ‘응? 그건 조청이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럴 수가. 왠지 모를 배신감이 치밀었다. 사건의 전말은 (아마도) 이러 하다. 


여덟 살 꼬마에게 ‘조청 한 번 먹어 볼래?’라고 하면, 아마도 ‘엄마 조청이 뭐야?’했을 것이고, ‘음 그것은 엿기름으로…’라고 하면 아마도 ‘엿기름이 뭐야?’했을 것이고, 또 그래서 ‘그러니까, 보리에 물을 부어서…’라고 하면 ‘그럼 보리밥이야?’ 했을 것이다.  결국 그것은 꿀이라고 정리하는 편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여태껏 꿀맛을 잘 모른다.

꿀 전문점 '프리모르스키 허니'

블라디보스톡의 상점에서는 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저렴하고 품질도 좋아 기념품으로도 괜찮은 선택이다. 간판에 꿀벌이 붙어있는 귀여운 가게는 연해주산 꿀을 종류별로 저렴하게 파는 꿀 전문점이다. 남은 루블화를 탈탈 털어 작은 꿀 두 통과 벌집까지 샀다. 믿을 수 없이 저렴해서 허탈할 지경이었다. 


한때 국내 요식업계를 강타한 벌집 아이스크림 열풍이 생각났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고, 학교 앞에는 벌집을 올려주는 소프트 아이스크림가게가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 쓰던 내게 그 아이스크림은 너무나 비쌌고, 등하굣길에 매일 구경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커다란 벌집을 이렇게 저렴하게 팔다니, 과거의 나에게 잔뜩 사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뜻밖에도, 블라디보스톡에서 꿀맛이란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 




납작복숭아를 찾아서


어느 순간 잊고 있었던 소기의 목적이 떠올랐다. 납작복숭아를 찾자. 내내 지나다니던 아르바트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일 가판대가 있는데, 그곳에서 납작복숭아를 판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가게의 외관은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할 것 같이 귀엽지만, 가게 간판은 ‘채소와 과일’이라는 칼 같이 진지한 의미이다. 너무나 러시아스러워서 마음에 들었다. 


이미 복숭아가 끝물인지 다른 과일에 비해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 어떠랴. 귀여우니 되었다. 푸근한 인상의 가게 주인은 ‘도대체 왜 한국인들은 이 복숭아를 찾는 거야?’라고 물었고, 나는 ‘음, 그냥 생긴 게 귀여워서?’라고 답했다. 그리곤 스스로 어이없어서 푹 웃어버렸다. 주인은 나를 ‘왜 저러지?’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 납작복숭아가 러시아어로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깨서 제가 묻기도 전에 ‘냅짹복순아?’ 라며 어색한 한국어로 나를 불렀기 때문. 나는 이 복숭아를 살 관상인가 보다.




비도 오고 그래서 


정신 차려보니 내 손에는 꿀 더미와 복숭아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니 갑자기 피로가 밀려왔고, 설상가상으로 비도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숙소로 돌아가 체크인을 마치고 방으로 향했다. 하얗고 바스락거리는 침구와 에어컨으로 유지되는 쾌적한 온도, 거울 속 피부가 적당히 좋아 보이는 노란색 간접조명까지. 천국이 따로 없었다. 잠깐 누워 시계를 보니 이제 오후 2시. 오늘도 부지런한 새는 일찍 피곤하다. 


‘아 잠깐만 쉬다가 아까 가지 못한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고 또 저기에 있는 바에 갔다가, 아니다 카페를 갔다가~~’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몸은 액체 괴물 상태로 침대에 붙어버렸다. ‘에이 그래 마침 비도 오는데 비가 그칠 때까지만 방에서 쉬자.’


잠시 누워서 조용함을 즐기다가 복숭아를 씻었다. 접시가 마땅치 않아 숙소의 와인잔 위에 복숭아를 올려 두었다. 왠지 귀여워서 바로 먹지 않고 잠깐 두기로 했다. 어느덧 돌아가기 전 마지막 저녁이다. 멋진 레스토랑을 가보면 좋겠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고 몸은 노곤했다. 문득 체크인 하며 받은 라운지바 쿠폰이 생각이 나서 주머니를 뒤졌다. 


‘호텔 라운지바 쿠폰 : 원 프리 드링크’ 

 

당연히 갈 일이 없을 것이므로 받자 마자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쿠폰이 꼬깃하게 들어있었다. 라운지바를 가볼까 하는 마음은 들었지만 어쩐지 발은 멈춰 있었다. 

 내가? 호텔 라운지바를? 그것도 혼자? 




으른이네, 으른이야


 아무도 제한선을 두지 않았지만 그런 곳은 으른들이나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 물론 나이로는 예에전에 어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난 아직 ‘으른’은 아닌 것이다. 이왕 가보기로 한 거 마음 속 빵빠레를 울리며 기똥찬 입장을 해보고 싶었다.


‘내빈 여러분, 큰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으른 들어가십니다!’


 놀랍게도 적막한 바 안으로 머쓱한 으른 한 명 입장했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그런지 혼자 술을 마시는 중년의 어른 한 명과 여기 애매하게 밥 먹으러 온 예비 으른 한 명이 전부였다. 


밥이 될 만한 메뉴를 찾아보다가 문득 블라디보스톡에 와서 해산물을 한 번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해산물 플래터를 주문했다. 혼자 온 탓에 남들 다 먹는 곰새우나 킹크랩 같은 메뉴는 구경도 못 했는데, 이렇게 고급스럽게 (그것도 공짜 술과 함께) 먹을 줄이야! 기념비적인 날이 되었다.

하하 나 이제 어른, 아니 으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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