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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ut peach May 26. 2019

아 맞다, 여기 러시아지

너무 가까워 망각했다. 블라디보스톡도 러시아라는 걸.

아 맞다, 여기 러시아지


MAX를 찍은 나의 자신감은 비행기 착륙과 함께 급하강했다. 낯선 땅을 밟기도 전, 러시아 공항 입국장에서 말이다. 바로 십 분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한국 승무원의 도움을 받다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러시아 입국심사대에 혼자 있음을 깨달았을 때 말이다. 


‘탑승권을 보여달라’는 평범한 질문을 받았는데, 나는 모바일 체크인을 이용했기 때문에 종이 탑승권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에서 사용 가능한 핸드폰 유심칩도 아직 사지 못했기에 핸드폰 어플로도 탑승권을 보여줄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 대답했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몇 가지 추가 질문을, 아니 호통을 당했다. 나는 해병대 캠프 교관 앞의 중학생처럼 무력했다. 온 힘을 다해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무해한 표정을 지어 나는 착한 사람임을 피력했고 그 덕분인지 결국 무사히 통과했다. 휴.



아 맞다, 여기 러시아지 2


PLAN
1) 달러를 공항 환전소에서 루블화로 바꾸고, 
2) 그 루블화로 유심칩을 구매한 뒤
3) 유심칩으로 인터넷에 접속하여 러시아판 우버인 ‘막심’ 어플로 택시를 불러 호텔로 간다.


계획은 야무졌지만, 그곳은 러시아였다. 공항 환전소는 일찌감치 영업을 마감했으며, 유심칩은 카드도 달러도 아닌 오직 루블화(러시아 화폐)로만 살 수 있었고, 공항의 택시기사들은 바가지를 씌우려 혈안이 되어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오 마이 갓. 머리가 하얘졌다. 돈도 유심칩도 없이는 여기서 꼼짝할 수 없다.


그제야 깨닫는다. ‘아 여기는 러시아지. 나는 혼자이고. 이제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다행히 공항 내 ATM기기에서 내가 가진 카드로도 루블화를 인출할 수 있었다. 수수료가 좀 나왔겠지만, 고민은 사치였다. 돈이 준비 되었으니 다음 관문은 유심칩 구매를 해야겠지. 블로그에서 보았던 유심 판매 코너로 달려갔는데, 웬걸 대기 줄이 끝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옆 유심 판매 코너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일에는 늘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만 판단력이 흐려진 나는 곧장 그곳에서 유심칩을 구매했다. 심지어 판매원은 손님 많은 가게보다 더 친절했고, 남들 따라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거스름돈을 건네받으며 “왜 저기만 줄이 길어요?”라고 물었지만, 판매원은 “글쎄요”라는 애매한 답변만을 남겼다. 아무튼, 그렇게 여행에서 가장 어려운 두 산을 넘었다. 


* 알고보니 그 유심칩은 무려 20기가짜리 유심이었다. 역시 친절에는 이유가 있는 것. 하지만 러시아는 통신비가 저렴한 편으로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한국에 루블화를 취급하는 은행이 많지 않아, 한국에서 달러로 환전한 뒤 러시아에서 다시 루블화로 환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곤란을 겪고 싶지 않다면 애초에 루블화로 환전해 가는 것도 좋겠다.




아 맞다, 여기 러시아지 3


러시아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에따 라시아’ (Это Россия)

직역하면 ‘여기 러시아야’ 혹은 ‘이게 러시아야’라는 뜻인데, 여러 의미를 내포하지만 대체로 불합리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긴 러시아인데, 어쩌겠어?’라며 합리화하는 데 쓰이는 말이다.  


이왕 늦어진 거 택시 대신 버스를 타고 천천히 구경하며 갈까 싶어 가이드북에서 설명한 대로 공항 바로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차에 짐을 올리고 출발을 기다리는데, 기사는 도무지 출발할 생각을 않는 것이다. 불안해진 나는 차에서 내렸고, 근처 승무원에게 이 버스가 맞는지 물었다. 단정한 유니폼 차림의 그녀는 담배를 연신 피우며 말했다. 


 “맞으니까 기다려라. 차는 갈 때 되면 간다.”

 갈 때 되면 간다니, 이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나? 하지만 이내 이해하기로 했다.

 아 맞다 여기 러시아지. 그래그래. 에따 라시아. 



버스는 40분쯤 달려 블라디보스톡의 번화가인 아르바트거리에 나를 덩그러니 두고 떠났다. 낯선 곳에서 첫 숙소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지만, 이번엔 특별히 더 두려웠다. 혼자여서 이기도 했지만 블라디보스톡의 첫인상은 온통 탁한 회색 빛이었고, 거리는 매캐한 매연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내가 미쳤지. 이런 곳에 혼자 오다니. 두려움이 기대를 저만치 앞질렀다. 하지만 일단 가야 한다. 걸어야 한다. 빨라진 걸음 덕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숙소에 도착했다. 첫 숙소는 영어로 ‘이퀘이터’ 러시아어로는 ‘이크바토르’(Экватор)라는 3성급 호텔이었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위층은 최근 리모델링을 마쳐 깔끔하다. 


정신없이 체크인을 마치고 방 앞에 도착해서야, 내 손에는 카드키가 아닌 열쇠가 들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열쇠를 사용해 본지 오래된 터라 당황해서인지 몇 번을 돌려도 열리지 않았고, 낑낑대는 나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화가 났다. 러시아에 도착한 이후, 잘 풀리는 일이 단 한 개도 없다는 것에. 굳게 닫힌 문을 온몸으로 밀어 대며 속으로 외쳤다. ‘왜 모든 일이 꼬이는 거지! 아니 정말! 왜 이러는 거냐고오!’ 그렇게 오 분쯤 지났을까. 방문과 홀로 고독한 씨름을 하던 내 뚜껑이 열릴때쯤, 문도 뚜껑 열리듯 펑! 하고 열렸다. 휴우.


* 체크아웃 순간까지 문 여는 방법은 익숙해지지 않았고, 문을 열기 위해서 매번 속으로 ‘에네르기파-’를 외쳐야 했다. 여행 중 샤워기 트는 법과 열쇠 여는 법은 언제나 돌아갈 때쯤 익숙해진다.


이크바토르(이퀘이터)호텔의 웰컴문어

*이퀘이터 호텔의 시그니처 ‘웰컴문어’. 웰컴 쿠키도 드링크도 아닌 문어가 웬 말인가 싶고, 딱히 귀엽지도 않지만 어쩐지 기억에 남는 기념품이다. 문어 이름표에는 ‘바즈미 미냐 스 싸보이’(Возьми меня с собой) 즉 ‘나를 데려가세요’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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