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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민 Jan 09. 2022

"한열아 가자 광주로 가자"

고 배은심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고 배은심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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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책꽂이에는 1987년 월간조선 8월호가 꽂혀 있다.  고3시절 이 잡지에 실렸던 '6월평화혁명의 대드라마'라는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며 내가 부산 도심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사람들을 되짚었고,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어렴풋한 고민을 했었다.  비록 '조선'의 이름이 그 이후로 더 암담해졌긴 하나, 이 잡지 기사만큼은 명문이고 생생하기 이를데없는 기록이었고,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한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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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한 대목을 베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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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의 이한열군 장례식과 추모 행렬은 6.29 선언에 대한 학생 시민들의 답장이자 한달간 계속된 한국 드라마의 제 1장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장준하 열사 '김세진 열사'  문익환 목사가 민주화를 위해 몸바친 25명의 열사 이름을 외치자 연세대 교정을 꽉 메운 7만 군중 속에서는 오열이 새어나왔다. 이어 이한열군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마이크를 잡고 흐느끼며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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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들은 물러가라. 현정부는 물러가라. 한열아. 다 잊어버리고 가거라. 이 많은 청년들이 너의 피맺힌 한을 풀어줄 거야. 안되면 내가 풀겠다. 한열아. 가자 광주로. 한열아. 이제 광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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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글로, 동영상으로 본 장면이지만 다시 옮겨 적으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줍잖은 86정서라고 해도 좋고 꼰대의 라떼타령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저 자리에 있지도 못하는 고3이었지만)  그러나 저 장면. 문익환 목사가 부르짖은 25명의 이름과 뒤이은 어머니의 절규는 범연히 듣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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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절규는 그 자체로 역사다.  헌헌장부로 키운 아들이 산소마스크 쓴 의식불명으로 누웠을 때, 기어코 숨이 끊어졌을 때 그 마음 위에는 태산이 떨어지고 속에서는 용암이 끓어올랐으리라.   전두환이 얼마나 미웠을까. 기어코 전두환 저 살인마가 숨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야 저세상으로 떠나신 이유가 아닐까.  비록 교수대에서 대롱대롱 매달리는 것은 보지 못하셨지만, 그래도 저 짐승보다는 사람이 오래 살아야 하는 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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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잊어버리고 가거라." 


 어머니는 기억해야 했지만 자식에게는 잊으라 했다.  잊어버리라 했다.  경영자를 꿈꾸던 한 청년이 가슴 아프게 받아들여야 했던 모든 모순과 현실, 몽둥이질의 공포, 구속과 투옥의 암울한 미래,  최루탄이 찔러댄 눈매와 지랄탄의 욕지기 그 모두를 잊어버리라 했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었으리라.  거기서는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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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많은 청년들이 너의 한을 풀어 줄 거야." 


연세대학교 교정에는 7만여명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시청 앞 장례식까지도 사람들이 미어터지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월간조선의 명문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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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한 구경거리로 삼은 이들도 있었다. 장례행렬을 봐 두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으로서는 의무라고 생각한 시민들도 많았다. 구호를 한 번 더 외치고 못다 친 박수를 한 번 더 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도 많았다. 생각의 각론이야 어찌되었건 총론은 하나였다. 이 땅의 민주화는,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명령이라는 생각, 그 민주화는 이군과 같은 비극을 마지막으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원이었다." 



 어머니는 자식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시청에 몰려든 사람들을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엄청난 머리 수 앞에서 자식의 꿈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 꿈이 실현되는 것은 대세이며, 역사는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리라 막연하게나마 믿으셨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그 이후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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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해를 넘기지 못하고 한국 사람들은 어머니를 배신했다.  그 해 가을의 어느 날, 어느 집회에서 찍힌 사진,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를 외면하는 그 유명한 사진에서 배은심 어머니는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에 있었다  수심에 그득한 얼굴로. 


어머니도 그를 짐작했을까 이 말씀을 덧붙였다.   "안되면 내가 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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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35년 동안 배은심 어머니는 자신의 각오를 위해 살다가 이제 이승의 기력을 소진하시고 아들 곁으로 가셨다.   "이제 광주로 가자"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이제 광주에서 아들 곁에 머무시기 바란다.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  아들과 같은 젊은이들, 서울인천경기강원충청영호남제주의 젊은이들이 치를 떨며 일어서고 독재에 맞서게 했던 역사, 광주에서 아드님과 함께 영원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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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무망한 약속을 남긴다. 


 "우리가 그 한을 풀겠다는 약속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우리가 해온 일이 있고 한 짓이 있고 못한 일을 봐 오신 분께 어찌 그런 약속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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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소한 '살인마'들의 동류가 돌아오지는 못하게 하기위해 발버둥칠 것이며, 그들과 싸운답시고 그들과 닮아갔던 이들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내밀겠습니다.  언젠가는 그 한이 시나브로 풀어질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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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9일 이한열 학생 장례식을 소재로 해서 만들어 봤던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qnH4lyAYiA


<광장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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