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지명관 교수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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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들과 답사를 다니며 오래된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100여년 전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고 모임도 했을 그 공간을 배경으로 21세기 초반의 사람들이 섰다. 그런데 하나같이 마스크를 썼다. 100년 뒤에도 이 사진이 전해진다면 담박에 2020년과 2021년께 살았던 (더 연장될지도 모르지만) 이들로 특정될 수 있으리라. 그때도 이 건물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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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사람들은 떠난다. 2021년 새해에 들어서자마자 한 노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지명관 교수(1924~2022). 100세를 2년 남기도록 살았으니 장수의 축복을 누렸다고 해야겠지만 그의 생애에 걸친 한국 현대사는 결코 녹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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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유신 독재에 이은 군부독재 체제 하에서 그는 지명관 이름 석 자보다는 특이한 필명으로 더 이름을 날렸다. 일본 잡지 <세계>에 한국의 암울한 현실을 폭로하고 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전하는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1973년부터 1988년까지 줄기차게 써냈던 ‘TK생’이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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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일을 가늠해 보면 유신 다음해로부터 6월항쟁 다음 해까지다. 대한민국의 ‘Darkest Hour’라고나 할까. 그는 덕성여대 교수로서 사상계 주간을 역임하며 정권에 미운털이 박혀 있었고 1972년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교편을 잡으며 사실상의 망명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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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TK생’으로 만든 사람 중의 하나는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였다. 선우휘는 세계 잡지사에 지명관을 소개했고 정보기관에 불려가 “TK생이 누구냐.”고 모진 닦달을 받으면서도 끝내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침내 어둠이 가시고 민주화의 여명이 밝아온 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끊겼으나 지명관이 본인이 TK생임을 밝힌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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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원장이었다. 이 취임사를 이낙연이 썼다, 아니다 윤태영이 썼다 말들이 많은데 어쨌든 지명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첫출발의 디딤판을 마련했던 이들의 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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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무현 정권과의 밀월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KBS 이사장으로서 정연주 사장 취임 문제를 두고 노무현 정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고, 노무현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여 조중동이 다투어 찾는 인터뷰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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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취임사를 맡았던 대통령에게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표현까지 썼고, “국민에게 버림받은 것을 탈권위라고 말하면 되는가.”라는 독설도 사양하지 않았다.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을 찍었다고 밝힌 적도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부고를 접하여 어떤 이가 고인을 ‘변절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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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무척 언짢았다. 우선 ‘변절’이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시대착오적인 단어라고 생각한다. ‘절개를 지키지 않고 배반한다’는 뜻인데 민주주의 시대에 ‘절개’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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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은 불사이군이라고 한 번 품은 생각을 죽어도 바꾸지 않아야 한다는 말인가. 절개의 대상은 무엇이며, 내용은 무엇인가. ‘반동분자’이든 ‘빨갱이’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두름으로 엮어 딱지붙이는 단어 중의 하나가 아닐까. 노무현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명박을 찍었다는 이유로 지명관 정도의 사람을 ‘변절’로 치부하는 정의로움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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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 시절, 지명관은 이른바 ‘노빠’들의 험한 공격에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노무현을 최악의 대통령이라 부르고 이명박을 두고 “이데올로기적 편향 없이 그야말로 ‘실용의 시대’를 이끌고 있고,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까지 수고 많이 하셨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한 과거가 소환된다면 필시 ‘TK생’으로서의 지명관의 역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고 ‘변절자’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역사적 건망증이 오히려 고마워진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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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 까먹고, 그리 관심도 없는(?) 분의 일을 굳이 왜 끄집어내는가 하는 의아함이 있을 수 있겠다. 그 이유는 고인을 옹호하려 함도 아니고, 쓸데없이 욕보이려 함도 아니다. 단지 수십년 이국 생활을 하면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힘을 쏟았던 인사가 지닐 수 있고, 표할 수 있었던 생각들을 돌아보고, 그런 류의 생각들을 ‘변절’로 쉽게 딱지붙여 치워 버릴 수 있는 경박함 (단지 지명관의 예가 아니라)을 경계하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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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들을 곱씹어 본다. 적어도 내게는 오늘날에도 되새길 덩어리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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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 때 저항한 민주화 세력이 민주화의 날에는 국민 통합을 이루어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민주화 세력 내에서도 파벌을 가르는 것이 너무 심하고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까지 자초하는 것 같아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 비판적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민주화 세력의 존재 의미는 사라지고 그 전체의 몰락도 찾아온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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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 지금 한국의 가장 근본적인 위기는 국민이 분열된 것과 국민이 정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이 상처가 낫게 치료해야 한다.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해 내가 쓴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싸울 때는 적과 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는 반대 세력과 자기 세력의 차이를 두지만 그것이 끝난 다음에는, 더욱이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국민을 어떻게 통합해야 하느냐를 신경 써야 한다. 어떤 사람은 군사정권에 가깝게 갔고 어떤 사람은 반대로 간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걸 통합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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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2000년대 이후 지명관 교수의 의견과는 여러모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절개(?)를 잃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가 타락했다고 보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발언하고 비판한 것이 우리 민주주의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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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관 교수는 그 살벌하던 시기에도 ‘독재의 수족’들이 발휘한 인간적 면모들을 밝힌 바 있었다. 중앙정보부 안에서도 그정체를 알면서도 묵인해 준 이들이 있었고, 감시를 맡은 경찰은 보고는 해야 하니까 행선지만 알려 주시라고 나는 다른 데서 시간 때우고 가겠다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에이 나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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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화를 들려주며 노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기 직업으로 밥은 먹지만 일 자체는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거죠. 이런 점에서 일본의 ‘다테샤카이(縱社會)’와는 다릅니다. 일본인은 개인적인 양심은 속에서 아니라고 울부짖어도 조직의 명령은 순순히 따릅니다. 좀 더 조직의 인간인 것입니다. 한국인은 권력자 입장에서 보면 통치하기 힘든 민족이라 할 수 있지요.” (문화일보 201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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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치하기 힘든’ 민족의 일원임에 자긍심을 느낀다. 그리고 거의 한 세기 풍랑 그득했던 한국 현대사 위를 항해한 노학자의 인생에 경의를 전하며 그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