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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민 Jan 04. 2022

칭경기념비전을 바라보며



120년 전 칭경기념비전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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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디 띠는 음력으로 따지는 것이지만 카톡에는 딩동거리는 것마다 호랑이가 판을 친다. 그래,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니 법적으로 새해면 호랑이띠인 것이다. 뭐 한 달 정도 간격이야 대충 없는 것으로 치자.  검은 호랑이의 해. 임인년이다.  최근(?)의 임인년은 1962년과 1902년이다. 


1962년 신년벽두에 한 중년의 여인이 비행기 트랩을 밟았다.  태어날 때 그녀의 조국은 이미 망하고 없었지만 아버지는 왕년의 황제였다.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귀국한 것이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지만 그녀는 순종비 윤씨 앞에서는 깎듯이 큰절을 했지만 손아래 사람의 큰절을 받을 때는 고개만 까딱하며 ‘족보’를 가리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녀도 광화문을 지나면서 지금도 교보빌딩 앞에 버티고 있는 칭경기념비전을 보았으리라. 칭경비전은 그로부터 60년 전, 지금으로부터 120년전의 임인년에 세워졌다. 


 1897년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절정기에 달해 있던 대영제국은 화려한 60주년 ‘애니벌서리’를 열었고 여기에는 후일의 충정공 민영환도 참석했다. 한 해 전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도 참석했던 민영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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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도가의 자제이자 탐관오리로 동학농민군에게 쳐죽일 대상으로 꼽혔던 민영환은 세계를 호령하는 두 나라의 국력을 들인 행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이러고 살면 안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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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서 고종 황제 앞에서 침이 말랐으리라.  우리가 이렇게 살면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빅토리아 여왕의 60주년의 위용을 손발 써 가며 재연했으리라. 이것이 칭경비전이 나오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된다. “흠 짐이 즉위한지 30년은 넘었고 40년이 언제더라” 그게 190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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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년은 고종 즉위 40년째 맞는 해였고 (1863년 즉위) 고종은 1852년생으로 우리 나이 쉰 한 살, 즉 망육순(望六旬)이 되는 해였다. 이에 더하여 고종이 황제의 칭호를 쓰고 대한제국을 수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게 칭경기념비고, 이 비를 보호하고자 세운 건물이 우리가 보는 칭경기념비전(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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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칭경비각(閣)이라 부르기도 한다. 웬지 전(殿)이라고 부르기엔 조촐한 건물이라. 그러나 엄연히 전(殿)이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대한제국대황제 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 稱慶紀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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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기념비전의 글씨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당시에는 황태자였던 순종의 글씨다. 존재감이라고는 죽은 뒤 장례식 때 벌어진 6.10 만세운동이 최대치일 이 허약한 군주의 글씨 같지 않게 호방하고 힘차다. 글씨를 잘 봐서가 아니라 문외한의 느낌으로도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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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년 빅토리아 여왕의 60주년 행사까지는 못되더라도 대한제국도 꽤 거창한 행사를 치르려고 했다. 고종황제 망육순 잔치는 진주 기생부터 평양 기생까지 불려올려 외교 사절들 불러 놓고 거창하게 치렀다. 그러나 40주년 기념식은 열지 못했다. 함경도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확산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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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꺾어지는 해 40주년을 그냥 보내기는 어려웠다. 다음해인 1903년 대한제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조선의 수군을 근대적 해군으로 재출발시키는 이벤트를 기획한다. 일본에서 중고 군함 양무호를 사들였다 이 양무(揚武)라는 이름도 고종 황제가 명명한 것이었으니 그 기대감을 짐작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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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항에서 이 양무호가 40주년 기념 예포를 빵빵 쏘아 주면 얼마나 고종 황제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까마는, 이 군함은 사기에 가까웠다. 영국의 화물선에 일본인들이 대포 몇 개 달고 팔아먹은 고물배가 양무호의 정체였다. 그나마 대포를 쏠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고종의 황자 영친왕 이은이 천연두에 걸리면서 40주년 기념식은 또 한 번 날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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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나라의 허장성세는 결국 부려 볼 기회도 잡지 못한 채 흐지부지됐다.  우리가 교보문고 앞에서 만나는 기념비전은 그 허세의 유산이다.  황제를 칭한 기쁨을 기념하는 것은 좋았으나 그로부터 10년도 못가 황제의 칭호는 왕으로 떨어졌고 왕의 나라는 송두리째 없어졌다. 기념비전 앞에 서 있었던 만세문은 어느 버르장머리없는 일본인이 뜯어가 자기 집 대문으로 썼다고 들었다. 우리에게 20세기는 그렇게 불운하고도 비극적으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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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년 전의 처지와 오늘날 우리의 위상은 비교하기 힘들 만큼 차이가 있다. 아무렴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을 한 저울에 올려 놓을 수 있겠는가. 그만큼 우리는 격동의 20세기를 통과해 왔고 온갖 역경을 딛고 여기까지는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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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그 성과로 허세를 부리고, 대한제국의 황제와 신하들처럼 코앞의 자신의 이익에 집착할 뿐 나라 밖 사정과 나라 안 형국을 내 알바 아니라고 팽개친다면 우리가 오늘날 세운 모든 거창한 건물들과 성과지표들과 숫자들이 120년 뒤 또 하나의 ‘칭경기념전’으로 남을지 또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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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올해 춘삼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다. 사상 최악의 대선이라는 평가에 이의가 없고 누굴 절박하게 지지해야 하는 사람보다는 누군가 끔찍하게 싫은 사람을 걸러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선거라는 데에도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지혜롭기를 바란다. 선택을 하든 선택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리든 그 결정이 충동이나 사사로운 이익이나 개인적 감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권재민의 나라 국민으로서 왕년의 황제 (고종 같은 이 말고)와 같은 고뇌를 통해 결단을 내려 주길 소망한다. 


아울러 신년 첫 유튜브 콘텐츠 




https://www.youtube.com/channel/UCxZtp1oPrlbe-ZTEfrH_ri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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