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의 우동집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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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운동이 가장 결의와 희망에 찼던 순간이라면 개인적으로 1988년 11월 13일의 노동자대회를 들 것 같다. 단병호 이하 노동자들이 피로 쓴 ‘노동해방’ 플래카드를 들고 그 뒤로 수만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행진하며 연세대학교에서 여의도까지 누볐던 날이다. 그날, 선봉의 혈서를 쓴 사람들 가운데에는 ‘세창 깡순이들’로 유명했던 세창물산 여성 노동자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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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물산은 노동 탄압으로 이름이 높았고 파업 투쟁 와중에 여성 노동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사였다. 그녀는 플래카드를 걸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지붕이 무너지면서 목숨을 잃었다. 이 세창물산의 투쟁과 나는 모기 눈곱만큼의 인연이 있는데 동아리에서 세창물산 투쟁을 그린 방현석의 소설 <새벽출정>을 노래극으로 만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이때 주인공격으로 두 명의 여학생이 나섰다. 한 명은 <진혼곡>으로 낙양의 오선지가를 올렸던 김영남이었고, 다른 한 명이 89학번 후배였다. 둘이 <잘가오 그대>를 이중창할 때의 울림은 지금도 가끔 기억 회로를 건드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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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소리 난다고 혼나기는 했으나 89학번 후배의 음색도 노래패랍시고 앰프나 날랐던 나를 비롯한 떨거지들과는 완연히 달랐었다. 직선으로 말해 ‘카수’였다. 유독 노래 잘하는 이들이 많아서 술집에서 다른 팀으로부터 기립박수와 함께 안주를 받아먹었던 89학번들 가운데에서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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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다 뿔뿔이 흩어져 제 먹고 살길 찾고 짝 찾고 아이들 낳아 기르고 등등 부산한 와중에 연이 짧아진 사람도 있고 엷어진 사람도 많았다. 이 89학번 후배도 그 중 하나였다. 들리는 소식은 거의 유이무삼하게 ‘노래’를 자신의 삶의 도구로 삼고, 투쟁의 무기로 엮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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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공장> 그리고 <천지인>이 그 활동 무대였고, 그들이 수명을 다한 뒤에는 부군 되는 사람과 함께 ‘엄보컬 김선수’로 어려운 사람들과 갑갑한 현장을 다니며 노래로 그 원기를 북돋워 준다고 했다. 선수는 뭐냐고 하니 아코디언을 기가 막히게 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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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강아지 눈물만큼도 영향을 주지 못한 모범적이지 못한 선배임을 전제로 하고, 나는 이 친구의 신입생 시절 첫 세미나 간사였다. 그러다보니 그 활약(?)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미안함도 아니고 부채감도 아닌 미묘한 무거움이 항상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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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사방에서 자영업자들의 비명이 들리는 이 엄혹한 시기에, 이 친구가 남편과 함께 우동집을 열었다는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이런 때 개업을 할 생각을 하지? 우동은 대체 누가 한다는 거야? 처음 소식을 전해 준 친구에게 캐묻다가 마침 저녁 시간을 맞춰 방문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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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역에서 내려 내 걸음으로 10분 가까이 걸었으니 역세권은 아니었고, 대로변도 아니었다. 이름마저 장사하겠다는 센스는 별로 없어 보이는 ‘홍제 우동’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때 낯익었던 작은 몸집의 홀 담당(?)이 보였다. 신입생 시절 제일 먼저 동아리방에 와설랑 돼지우리보다 한 등급 정도 위였을 동아리방을 번쩍번쩍 청소를 해 놓아서 사람들을 놀래켰던 재빠름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원래는 불러 놓고 술 한 잔 주고 싶었는데 혼자 주문받고 서빙 보면서 동분서주하는 사람을 그럴 수도 없어 음식만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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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가격들이 높지 않아서 먹을 수 있는 한 골고루 시켜 봤다. 원래 아무거나 가리지 않는 혓바닥이지만 내 혀에는 유달리 맛있는 음식에는 확실히 반응하는 미식가의 DNA가 있다. 시장통 옷 속에서 보디가드 팬티가 숨어서 빛나듯, 때가 되면 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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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우동을 처음 입에 넣었을 때 그 DNA가 슬금슬금 기동하는 게 느껴졌다. 무슨 배짱으로 이런 시기에 개업을 했냐고 끌끌 차던 혀가 “믿는 구석이 있었구만” 찬탄을 절로 지어 낸 것이다. 면은 탄력있게 낭창낭창했고 “눈툭멸 (눈 툭 튀어나온 멸치냐고 했더니 웃었다. 뭔지 모르겠다.), 고등어, 정어리 기타 등등 니라니라 여러 재료를 배합해서 만들었다는 육수는 국물을 말끔히 비워낼 만큼 날렵하게 맛났다. 다른 튀김들도 술안주로 좋았지만 술안주로 시킨 카레우동도 감동이었다. “카레 전문점을 해도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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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남편이 한다고 했다. 아니 그 ‘엄보컬’님은 언제 이런 걸 배웠다냐 하니 한때 한국에 진출했던 마루가메(丸亀)제면에서 오래 일하면서 그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어느 프랜차이즈 회사에 다닌다고 그 음식을 안다는 것은 무리일 터, 특별한 자리에 있었든지 특출한 관심과 의지를 발휘했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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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가메가 몇 년 전 일본이 무역 보복하고 그럴 때 피해를 엄청 봤고 코로나 때문에 치명타 맞고 철수했거든요. 그래서..... ” 나쁜 놈들 응징하겠다고 엄한 사람들 피해 줬던 성격이 강한 ‘일본 불매 운동’의 유탄을 맞았던 셈이다. 광복절날 일식집 주인이 문을 닫는 게 무슨 장한(?) 일로 신문에 나던 시기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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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게 일본 음식은 글자 그대로의 ‘별미’(別味)다. 차라리 양식으로 하루 세 끼 한 달을 먹으라면 먹겠는데 일식으로 그러라면 자신이 없다. 즉 가끔 먹을 때 가성비와 만족도가 극대화되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이 집 우동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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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을 싸고도는 건건하고 짭잘한 뒤 끝에 감도는 감칠맛과 뭣보다 성의가 느껴지는 면발은 이미 열 대여섯 시간이 지났어도 그 느낌이 입에서 가시지 않는다. 조금만 가까웠으면 후배가 하는 집이라서가 아니라 맛집으로 삼고 들러서 해장도 하고 끼니도 채우면서 미식을 즐길 수 있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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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시켰더니 그럼 너무 많이 시키는 거라며 주문량을 줄이자 같이 간 친구가 “돈 벌 자세가 안돼 있구만! 그냥 네! 하고 내오면 되는 거지!”하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자 이 ‘김선수’ “돈 많이 안벌어어도 돼” 하며 의연하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돈 많이 벌어야지 말을 보태다가 문득 “노래는 이제 안해?” 물었다. 그러자 김선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계속 할 거예요. 틈만 나면, 필요한 데 있으면 가서 할 거예요. 우리 남편도 그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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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보컬과 김선수’의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문득 저들의 활약을 직접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필요한 데’에 가서 아코디언 켜고 노래 부르며 “다 잠든 밤에 그 가슴에 남모르게 치솟는 불같은 노래를, 꽃지듯이 떠난 이들의 큰이름을 소리높여 부르는 노래를‘(양성우 시, 친구를 위하여 중) 불렀던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은 적이 없다는 점에 또 한 번 껄쩍지근한 감정이 솟아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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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 근처에 사시거나 직장 있으신 분들은 꼭 한 번 들러 보시기 바란다. 위치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금도 노래로 사람에게 힘을 주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부부가 담아내는 우동 한 그릇 맛보시기 바란다. 이건 후배의 음식에 대한 주례사 칭찬이 아니다.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