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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민 Nov 16. 2022

입암산성을 찾아서 2

나는 누구를 닮았을까 

입암산성 위에서 , 나는 누구와 닮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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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길게 잇는 입암산성의 내부는 의외로 평평한 분지다.  비가 오면 성내부의 곳곳은 습지로 변할 정도로 물이 풍족한 지형이다.  이래저래 사람들 들어와 농성하기에는 괜찮은 성이었을 것 같다.  답사 길잡이 밤재 선생이 애써 일행을 길이 나 있지도 않은 높은 풀투성이의 언덕으로 이끈다. 뭐가 있나 했더니 정유재란 당시 이곳을 지키다 죽은 윤진이라는 사람의 순의비였다. 즉 의롭게 순절한 사람의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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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의 가장 큰 목표 중의 하나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발을 디디지 못했던 전라도였다. 일본군의 한쪽은 안의의 황석산성을 함락시키고 남원을 통해 전라도 내륙으로 들어왔고 이 와중에 입암산성도 일본군에게 짓밟힌다.  윤진은 이때 죽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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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병사, 즉 전라도 지역 관군 사령관은 이미 남원에서 전사했다.  전라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 눈에는 핏발이 섰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지옥문이 열린 것이다. 성 안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외로운 성에서 농성하다가 도망갈 데도 없이 죽을 수는 없지 않으냐.  하지만 윤진은 입암산성에 남는다. 전라 감사 이정암에게 입암산성을 수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허락을 받아내 각종 공사를 마친 이가 바로 윤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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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이 들이닥치자 누군가 속삭인다. “당신은 성을 쌓으라는 명령만 받았지 지키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잖소. 도망가도 됩니다.” 달콤한 유혹. 그리고 합리적인 설득. 더하여 편리한 논리. 벼슬아치도 아니었고 성의 수비 책임자도 아닌 처지에, 고을 수령도 도망간 마당에, 윤진은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윤진은 남는다.  “이 성을 도망가라고 쌓았겠습니까. 적에게 맞서 싸우라고 쌓았지.” 역시 간단한 대답. 입술 깨문 결의. 그리고 책임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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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조선 조정이 놓치지 않은 일 중의 하나는 “책임 추궁”이었다. 이 난리가 누구의 책임인가를 물으며 피를 토하고 머리 짓찧고 땅을 치고 자빠졌었다. 아무개를 죽여야 하옵니다. 목을 쳐서 매달아야 하옵니다. 이 일이 누구의 책임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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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책임진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되레 책임질 것도 없는 사람들이 없는 책임을 만들어서 지는 경우가 많았다.  윤진이 처음 전쟁에 뛰어든 것은 전라도 장성 땅의 ‘남문창의’ 때 의병장 김경수의 종사관으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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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 못난 늙은이가 삼가 뜻있는 선비들에게 고하노라. 지팡이를 의지하여 북녘 하늘을 우러르니 슬프도다.... 아아, 호남의 오십 주군(州郡)에 어찌 의기 있는 남아가 없으리오? 지사들이여, 모두 일어나 의로운 칼을 들어 나라를 구하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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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수는 예조 좌랑 잠깐 지내고 낙향한 사람이고, 윤진은 참봉 벼슬 출신이었다. 솔직히 어디 가서 숨어 지내도 욕할 사람 아무도 없고, 목숨 걸고 가산 팔아 갚아야 할 임금의 ‘은혜’를 크게 입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일어섰고 윤진은 아내와 함께 죽었고 김경수는 두 자식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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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로로 그 가문들이 현달하고 대대손손 번창했으면 좋았겠는데 전쟁이 끝난 뒤 아니 심지어 전쟁 중에도 조정이 한 일은 의병장들을 숙청하고 외면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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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1894년 갑오년. 폭정에 저항하여 일어선 동학군은 자신들을 빌미로 외국군이 개입할까 두려워 해산했지만 민비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청나라군을 끌어들인다. “동학의 무리들을 내 어찌 왜놈처럼 여기랴만 임오군란과 같은 일을 다시는 참을 수 없다.” (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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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청나라군이 들어오자 ‘왜군’들도 당연히 들어온다. 갑신정변 후 체결된 한성조약에 명문화된 문구의 결과였지만 조선 조정은 그조차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어마무시한 상황에서 전봉준의 동학군은 다시 궐기하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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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진맥진한 전봉준이 피신하던 길 도상에 입암산성이 있었다. 전봉준은 입암산성 별장으로 있던 이종록을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것 같다. 아무리 퇴락한 산성의 별장이라 해도 패잔병과 진배없는 전봉준을 돌돌 묶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항차 원하는 곳의 군수 자리를 준다는 현상수배령이 떨어진 뒤였다. 하지만 이종록은 전봉준을 하루 묵게 하고 밥까지 먹여 놓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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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그것은 별장 이종록이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선의였을 것이다. 동시에 목이 달아날 지 모를 위험을 감수한 선의란 곧 자신의 목을 날릴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다. 이종록은 그렇게 했다. 전봉준과 이종록이 입암산 꼭대기의 갓바위를 오를 여유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행여 그랬다면 둘은 한숨을 쉬며 눈앞의 고을들과 머리 뒤 산줄기를 바라보며 탄식했으리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어섰는데 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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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와 식민통치의 가해자가 일본 제국주의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에 못지않은 책임이 당시 조선의 지배층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누릴 수 있는 권력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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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의 생존이 아니라 왕가와 가문의 생존을 먼저 고민했고, 백성들을 어떻게 잘 살게 할까의 고민보다는 어떻게 내일을 오늘같이 누릴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개혁이든 경장이든 그 계산 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에 반하는 이들을 짓밟았다. 하다못해 동학군을 극성스럽게 살해한 것은 일본군이라기보다는 관군이었다. 고종에게 상욕을 퍼붓고 민비의 뺨을 때려 주고 싶은 이유다.  


 갓바위 정상에 오른 시간이 지연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하산을 서두르자는 얘기가 전달됐지만 정상의 풍경에 취한 일행들이 사진을 찍고 포즈 취하고 분위기 잡으면서 점차 하산이 미뤄진 것이다. 나중에는 고함을 질러 가면서 사람들을 아래로 내몰았지만 좀 빨리 내려온 축인 아내와 나만 해도 산기슭 쯤에서 이미 어둠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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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뒤에는 30 명 이상의 50대 회원들이 어둠을 헤치고 있었다. 제대로 난 길도 아닌 너덜길과 풀숲길이었다. 거의 평지에 내려왔을 때 리더였던 밤재 선생이 길을 되짚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일행을 찾아 다시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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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미에 등산 전문가 있으시잖아요. 그분 믿고 기다려요. 괜히 바삐 올라가다가 다쳐요. 형도 플래시 하나 없으면서 어떻게 올라가.” 

 “괜찮아 나는 시골 출신이라 이런 길 정도는 뛰어 다녔어. 한 번 내려와 봤으니 길도 눈에 익어. 걱정이 돼서 앉아 있을 수가 없네. 어서 내려가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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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수십분 동안 그는 이미 깜깜해진 산길을 두어 번 뛰어오르고 내려왔다. 어둠 속을 헤치고 너걸길 깡총거리며 뛰어 올라가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격려하고 주요 지점을 안내하고, 핸드폰 플래쉬라도 비춰 줬다. 마지막 그룹이 내려왔을 때 그 뒤에 따라붙은 그는 물에 빠진 곰처럼 땀에 젖어 있었다.  “간만에 산길 좀 뛰었더니 내일 아침 알이 배기겠네.” 농담을 하면서.  이 모습을 함께 지켜본 아내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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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어디 답사 길잡이같은 거 하면 안되겠다.”

 “왜?” 

 “저렇게 애쓰게 하고 싶지 않아.  리더라면 당연한 책임감인데 당연한 건데..... 당연한 걸 못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당신도 그럴 거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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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사람을 뭘로 보고! 하는 생각에 짐짓 위엄을 세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말에 반박할 자신감이 엷어서다.. 입암산성을 둘러보며 만난 사람들의 여러 면면 가운데 나는 어디쯤에 서 있을지 가늠이 안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어느 정도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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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뿔도 받은 것 없으면서 임금의 은혜 갚고자, 또 자기 고장 지키고자 일어섰던 윤진, 김경수 정도는 될 수 있을까. 전봉준은 언감생심이어도 관군 별장 신분으로 그를 재우고 먹여서 보낼 이종록 정도의 깜냥은 지닐 수 있을까. 과연 고종이나 민비, 그리고 당시 그에 빌붙여 엉화를 누리던 조선 지배층의 대열에 끼더라도 죄책감이나 양심은 지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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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얕보이기 시작하면 이미 권력이 아니나 얕보일 만한 짓을 저지른 권력은 완악해지고 동시에 소심해지게 마련이다.  사소한 핑계로도 사람을 잡고, 그 핑계를 위해서는 무슨 명분이라도 갖다 대기 마련이며, 억지를 부리게 마련이며 그 억지가 먹혀들어갈 때 사회는 굳어지고 변화의 조짐은 꺼져 간다. 아울러 그 억지에 저항하는 이들을 분노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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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후기가 조선 전기보다 더 폐쇄적인 분위기로 흐르고, 질문과 도전을 허용치 않는 학풍과 정치 체제로 전락해 간 것은 반성하지 못한 권력, 나아가 반성의 이유를 잊은 권력이 낳은 당연지사가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의 지도자, 또는 지배층은 어떠할까.  입암산성의 기억과 고민을 몇 주 뒤에 떠올려 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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