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 보타니스트 김명진
그녀를 만난 날, 서울의 바람은 선선했고, 하늘은 맑았고, 햇볕은 눈부셨다. 한 번 가봐야지 하고 오래전에 마음먹었던 꽃시장에 직접 간 것은 처음이었다. 만나기로 한 카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서는 명진은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다. 단정한 원피스에 빈티지 스타일의 구두를 신었다. 조곤조곤 이어가는 말소리, 하지만 걸음은 거침이 없다.
명진은 벌써 9년째 꽃시장을 드나들고 있다. 성수기에는 매일 들린다는 꽃시장에서 그녀는 루틴을 따라가듯 막힘없는 발걸음에 마주치는 이들마다 가벼운 눈인사를 보낸다. 자주 가는 소품점 주인과는 자매 같은 사이가 되어 상투적 인사도 없이 늘 곁에 있는 이 마냥 본론부터 시작이다. 경부선 3층에 넓게 자리한 꽃시장은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길목만 만들어두고 사방에 단을 쌓아 그 위로 꽃의 아파트를 만들어두었다. 양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꽃 한 무더기를 어깨에 메고 가는 사람, 양쪽 꽃단에 닿을 듯 빠르게 손수레를 끌고 가는 아저씨 사이에서도 그녀는 막힘이 없다. 동행한 사진가와 나는 그녀를 쫓느라 정신이 없다. 그녀를 앵글에 담아야 하는 사진가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 곁을 뜨지 않고, 앵글을 피하면서 사람들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정신이 없는 나는 결국 두세 번은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까치발을 들어 어딘가에서 손을 들고 신호를 보내고 있을 사진작가를 눈으로 좇는다. 내 눈에는 다 같은 꽃인데 집집마다 취급하는 꽃에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미로 같은 길을 익숙하게 지나 몇몇 단골집에 들린 그녀에게 꽃집 주인들은 모두 삼촌이고 이모다. 퉁명스러운 말투지만 아껴둔 좋은 꽃을 조금이라도 싸게 내어주려는 삼촌의 손길은 섬세하다. 삼촌이 투박한 손으로 꼼꼼하게 포장해준 꽃 무더기를 한 아름 안고 익숙하게 시장을 나서는 명진의 표정은 평온하다. 반면에 나와 사진가의 얼굴은 영혼이 탈탈 털려있다.
9년 전, 그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김명진은 당시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오빠를 통해 플로리스트와 가드너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되었다. 9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는 플로리스트라고 소개하면 플루티스트로 이해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였지만,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발달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일을 좋아한 여동생의 성향과 취향을 잘 알고 있던 오빠는 독일에서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플로리스트와 가드너라는 직업이 명진에게 잘 맞을 거라 생각했다. 6개월 정도 전문 교육을 받고 규모가 큰 꽃집에서 오랫동안 경력을 쌓은 명진은 2년 전 ‘플뢰 드 보배’라는 자신만의 보타닉 브랜드를 만들었다.
플뢰 드 보배는 성수동에 있는 ‘레 필로소피’라는 카페 안에 자리한 숍인숍(shop-in-shop) 형태의 식물 전문 브랜드이다. 꽃을 다루는 일 외에도 가드닝과 전문가 육성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의도 하고, 조향 관련 제품도 함께 다루고 있다. ‘철학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레 필로소피는 커피를 만드는 사람,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는 사람, 영화를 만드는 사람, 꽃을 만지는 사람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공간이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느낌의 프렌치 스타일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파리에 있는 동명의 카페에서 콘셉트를 가지고 온 레 필로소피는 그녀만의 브랜드를 보여주기에 딱 맞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플뢰 드 보배를 직역하면 ‘보배의 꽃’이라는 뜻인데,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보배로운 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또한 ‘보배’는 김명진의 또 다른 이름인데, 그래서 김명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꽃이라는 의미도 있다.
레 필로소피, 그리고 플뢰 드 보배가 자리한 성수동은 명진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동네이다. 잘 모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보물 같은 장소가 곳곳에 숨어있는 매력이 있는 동네이고, 꽃시장과도 가까우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도 성수동에 온 뒤로 명진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밌는 일도 많이 생겼고, 좋은 인연도 많이 만났고, 영감을 주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인연 중엔 그녀의 남편도 있다. 2년 전 카페가 막 문을 열었을 당시 카페에서 작은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사진가인 그녀의 남편이 전시에 참여하면서 만나게 되었다고. 촬영이 있는 날을 제외하곤 항상 그녀의 일을 도와준다는 남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에는 꿀이 가득하다. 운전이 서툰 그녀를 위해 꽃시장에는 꼭 같이 가려고 해주고, 어쩌다 배송 기사님의 스케줄이 맞지 않으면 남편이 직접 배달을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녀가 꽃과 작업하는 모습을 사진에 예쁘게 담아주기도 한다.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진정 행복하다고 말하는 명진에게 그녀의 남편이 얼마나 큰 부분인지 미혼인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다만,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에 일말의 영향을 미친 건 분명하다.
플로리스트이자 가드너이자 조향사인 동시에 식물과 관련한 전반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보타니스트 김명진의 시작은 꽃이었다. 지금도 매출이나 업무 비중의 면에서 꽃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공급 과잉인 분야이다 보니 경쟁력이 큰 편이 아니기에 부수적으로 여러 가지 관련 분야를 배우게 되었다고. 꽃을 접하면서 화분을 다루는 일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는데, 싱그러운 초록의 식물을 다루는 일에 매력을 느껴 전문적인 가드닝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꽃뿐만 아니라 가드닝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식물 키우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서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에서도 심심찮게 아기자기한 화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반려식물 입양이라는 말도 생길 정도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집 안에 식물을 들이는 것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접하기 쉬워진 만큼 책임의 무게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 많아진 것에 대해 명진은 우려를 보인다.
“결혼 후 신혼집에 식물을 들여야 하는데, 꽤 오랜 시간을 고민을 하다가 3주 전에서야 하나 들였어요. 식물을 들인다는 건 그만큼 신중한 일이죠. 꽃은 시들면 잘 말려서 드라이플라워 등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시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반해, 식물은 시들면 꽃집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요. 잘 자라지 못한 식물에 대한 책임이 마치 식물 자체나 그 식물을 판매한 사람의 잘못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렇지 않더라도 몇 번 식물을 키우는 것에 실패한 경험을 하다 보면 스스로 소질이 없다고 단정 짓고 더 이상 식물을 들이지 않으려고도 해요. 반려동물과 마찬가지로 반려식물과도 소통하는 것이 중요한데, 선인장이나 다육식물은 무관심한 듯 내버려둬야 잘 자라고, 허브는 관심을 듬뿍 줘야 건강하게 잘 자라요. 이렇게, 어떤 식물을 들이느냐에 따라 그에 맞는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식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고 있는데, 그녀가 하는 플라워 강좌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전문가 육성 과정은 물론, 취미로 배우러 오거나 사랑하는 이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 등 매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꽃과 식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실제로 주위에서도 심심찮게 플라워 강의를 들으러 가는 친구들을 볼 수 있는데, 플로리스트와 가드너가 소위 ‘트렌디한’ 직업이 됨에 따라 일시적인 유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보통 나이가 들면 꽃과 자연을 좋아하게 된다고들 해요. 하지만 초록을 찾고 인공물이 아닌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살이가 각박해질수록 점점 더 그렇게 될 거라고 봐요. 그래서인지 ‘플뢰 드 보배’에도 태교를 위해서나, 마음이 편안해지고자 하는 분들이 꽃을 배우러 많이 오세요. 과정에서도 즐거워하시지만, 수업시간이 지나면 예쁜 결과물이 생기니까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선물을 위해서 오는 분들도 많아요. 남자분들은 주로 가드닝을 배우러 오시는데, 여자 친구 등쌀에 밀려서 오거나 회사 동호회에서 단체로 오시는 경우도 있어요. 손이 너무 커서 아무리 조심해서 만진다고 해도 꽃봉오리를 눌려버리는 경우도 있죠. 서툴지만 노력해서 스스로 만든 꽃 작품을 품에 안고 아이처럼 기뻐하며 돌아가는 분들을 보면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요.”
이렇게 돈을 지불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양 쪽이 모두 행복한 직업이 또 있을까 생각해보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명진도 자신의 직업이 가진 행복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꽃을 사가는 사람, 그 꽃을 받는 사람, 그리고 한 식물과 함께 지내게 될 사람의 입장에 서 보려고 한다. 내가 받았을 때 기분 좋은 꽃, 나도 좋아해서 계속 맡고 싶은 향, 늘 나의 곁에 있었으면 하는 식물을 판매하고자 한다. 이렇게 보면 너무 주관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손님은 사실 원하는 것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문가의 의견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손님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사람마다 각자의 특성과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꽃이 다 다르고, 상황에 맞는 꽃이 있기 때문에 어떤 용도로 구매하는지, 받는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 지난번엔 어떤 선물을 했었는지 등 꽤나 자세하게 물어보는 편이다. 실제로 그녀의 손님들은 대다수 단골인데, 그녀에게 꽃이나 식물을 주문할 때면 몇일의 여유를 두고 주문을 한다. 오랜 시간과 그만큼의 정성을 들여 만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보배의 꽃’. 그 진가를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플뢰 드 보배를 찾는다.
여름의 초입에 든 화창한 날, 햇살을 한껏 머금을 꽃을 보고 있자니 한 송이 사가야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명진에게 지금 제일 예쁜 꽃을 물었더니 수국과 유칼립투스를 추천해주었다. 수국은 6~7월에 많이 나오는 꽃으로, 속이 보이는 화병에 한 송이 툭 꽂아 놓으면 시원한 느낌이 나서 좋다. 빨리 시드는 꽃이라고 많이들 오해를 하는데, 이름 그대로 물을 아주 좋아하는 꽃이라서 물만 넉넉하게 주면 오랫동안 살아있는 꽃이다. 시들시들해 보이면 머리까지 물에 푹 담갔다 꺼내면 생기를 다시 찾는다. 유칼립투스는 모기향 냄새를 싫어하거나, 집에 아이들이 있어서 모기약을 쓸 수 없다면 좋은 식물이다. 욕실 등 습기가 많은 곳이 묶어두면 모기 퇴치의 효과를 낸다. 드라이플라워로도 좋은 식물이라서, 어울리는 장소에 잘 걸어두면 인테리어 효과도 있다. 드라이플라워를 잘 만들려면 뒤집어서 말리는 것이 좋다. 꽃은 줄기보다 얼굴이 크니까 마르면서 꺾이기 마련인데, 뒤집어서 말리면 그걸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얼굴이 작은 꽃이나 식물을 선택하는 게 팁이라면 팁이겠다. 같은 장미라도 송이가 조금 작은 것이 좋다. 건조하고 통풍이 잘 드는 곳에서 말리면 썩지 않고 잘 마른다. 꽃이 가진 본래의 색을 유지하고 싶다면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곳에서 말리면 색도 잘 유지하면서 말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명진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녀는 이 질문에 다소간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에게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경험했으면 한다. 식물이든, 꽃이든 나의 손을 거치면 더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 그것이 어떤 이에게 전해졌을 때,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행복을 느꼈으면 한다. 꽃을 사가는 사가는 사람도, 그 꽃을 받는 사람도 진심으로 행복해하도록 만족감을 주는 것. 그래서 다시 꽃이 생각날 때면 찾게 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이 있는 자리
그곳은 나의 빛나는 계절
- 플뢰 드 보배
2017년 6월 17일 토요일.
글_황은솔
사진_이현재
협조_플레이버 www.flavr.co.kr
김명진_ @florist.bo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