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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씩식이 Jul 27. 2017

자유와 완벽과 순수한 커피

서른여덟, 바리스타 이경용

서울이라는 메가 시티에서 완벽한 휴식을 취하는 방법에 관해 논해보려 한다. 조금 괜찮다 싶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셜 미디어에 사진이 올라오고 ‘핫 플레이스’가 되어버리는 지금의 서울에서, 어릴 적 꿈꾸던 나만의 동굴 같은 곳을 찾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 걸까. 어릴적 나는 책상에 이불을 씌우고 그 아래로 기어 들어가 나만의 아지트가 생겼다며 은밀한 미소를 짓곤 했었는데, 나와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장영실 위인전(어렸을 적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과 바둑이(어딜 가나 데리고 다니던 강아지 인형), 그리고 초코과자 한 통(아껴 먹느라 눅눅해진 칸쵸) 뿐이었다. 그곳에서 나만의 동굴을 만들고, 나는 빛도 들어오지 못하게 틈을 꽁꽁 매우느라 자꾸만 이불을 잡아당기곤 했다. 책상에서 자꾸만 미끄러진 이불 밖에는 못 본 척 돌아 앉아 있지만 동동거리는 막내 손녀딸이 귀여운 외할머니의 주름진 미소가 있었다. 

형제가 많은 집의 막내딸인 우리 엄마는 당시 평균 결혼 나이보다 거진 10년 정도 늦은 시집을 갔다. 형제라고는 오빠와 나 둘 뿐이지만, 외갓집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제일 꼬맹이를 담당한 건 역시 나였다. 제일 큰 이모의 첫째 딸과 우리 엄마의 나이는 겨우 서너 살 차이가 났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십 년이 되었지만, 할머니와 둘이서 작은 아파트 구석에서 꽁냥 대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워킹맘이었던 엄마 대신에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언제나 할머니다. 내 최초의 기억부터 함께해온 외할머니의 허리는 언제나 굽어있다. 외할머니의 굽은 등 위로 꾸물대며 기어올라 업히면, 외할머니가 끙차 소리를 내며 허리를 곧게 폈다. 작은 아이의 눈에도 작기만 했던 노인의 등에 타서 평소의 시선보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의 느낀 시각적 충격과 신선함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오래된 주택과 가로수 사이에 폭 쌓여 가만히 자리한 곳.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동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 볕이 잘 드는 창가와 폭신한 소파, 향긋한 커피내음까지. 일상을 뒤섞어놓은 생각들은 멈추고, 맛있는 커피를 홀짝이며, 테이블엔 읽고 싶던 책을 쌓아둔 채 하루 종일 머물고 싶은 곳. 이만하면 꽤 괜찮은 동굴이다. 책상 위에 덮어놓은 이불과 할머니는 없지만, 따뜻한 조명과 맘씨 좋은 주인장이 있다. '동네 카페’, ‘나만 알고 싶은 곳’ 등의 별명을 얻으며 블로그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점점 이름을 알리고 있는 카페, 슬리핑 포레스트이다.

나의 동굴, 아니 카페 슬리핑 포레스트는 '연남동 벚꽃길’이라 불리는 길에 면해 있는데, 봄에는 꽃구경, 여름에는 그늘이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다. 골목에서도 안쪽에 자리해있고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주택의 2층에 자리하고 있어서 눈에 잘 띄지는 않는데, 카페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모이는 동네인 만큼 슬리핑 포레스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비 오는 월요일,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 들어선 카페는 아직 한적하다. 평일 낮의 여유로운 시간이 아니면 바리스타 이경용과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 것 같아 일부러 시간을 맞췄음에도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는 손님들이 마실 커피는 꼭 직접 만든다. 단 한 명의 손님을 위한 커피 한 잔도 그냥 내어가는 법이 없다. 원하는 맛이 나올 때까지 뽑고 버리기를 반복한다. 한 잔의 커피를 만드는 데에 시간과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는 적자를 보고 판매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낙 품질이 좋은 스페셜티 원두를 사용하는 데다, 깐깐한 바리스타의 기준에 부합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 잔의 아메리카노를 위해 열 잔의 에스프레소를 뽑는 경우도 허다하다.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커피 맛을 본 사람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경용이 커피 일을 시작한 지는 10년이 되었지만, 본인의 이름을 걸고 카페를 차린지는 두 달 정도가 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요즘 그는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카페에서 서식 중이다.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외국에 나가서 유학을 하고 온 것도 아니지만, 그만의 정확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카페 오픈 전 여의도에서 3년 동안 커피 트럭을 운영했을 때도, 연남동에 정착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준에 맞게 만든 커피를 좋아한다. 유난히 단골이 많은 이유이다.

시티 보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슬리핑 포레스트의 대표이자 바리스타인 이경용 역시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는 사는 사람이다. 돈을 버는 이유가 돈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순간의 삶에 있다. 삶을 즐기면서 산다는 건, 고된 출퇴근으로 어깨가 굽은 이들에게는 판타지나 다름없는 말이다. 마냥 부러움을 표하는 나에게, 그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즐기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페를 운영하고, 익스트림 레저를 즐기러 떠나고, 평소에도 좋은 사람들과 술자리를 자주 갖다 보니 경제적으로나 생활 면에서 여유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히 ‘여유 있다’라고 말하기는 힘든 것 같아요. 선택의 문제인 거죠. 내가 여든 살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물리적으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절반 정도일 거예요.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깝고, 좋아하는 일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워낙 활동적이기도 하고, 뭔가에 꽂히면 무조건 해야 하는 성격이라서 더 그런 거 같아요. 그것이 그저 취미이든 직업이든,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대충 어느 선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려요. 생각보다 아주 피곤한 일이죠. 일주일 내내 제대로 앉을 새도 없이 카페 일을 하다가, 밤에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어쩌다 쉬는 날이 생기면 보드를 타거나 서핑을 하러 가요. 웨이크보드를 탈 때도 있고요. 주말, 주중 할 것 없이 스케줄이 아주 빡빡한 편이에요. 시간이나 돈이나 조금의 여유도 없어요. 만약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수익률이 좋은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을 차리고 매니저와 아르바이트생에게 일을 맡겨둔 채 휴양지로 놀러 다녔겠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그럴 수 있는 성격도 아니고.”

작금의 대한민국은 중국집이나 부동산보다 커피집이 더 많은 실정이다. 대한민국의 성인은 1년에 평균 370잔의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이렇게 자주, 많이 마시다 보니 커피 좀 마신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적인 커피 취향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만을 찾거나, 콜드 브루잉 커피 등 특정 스타일만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자기 입맛에 맞으면 맛있는 커피라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소주를 즐기는 분들이라면 선호하는 특정 브랜드가 있어요. 이런 분들은 식당에 가서도 ‘이모, 소주 한 병 주세요’ 하지 않고 ‘참이슬 한 병 주세요’ 하죠. 맥주나 와인도 마찬가지고요. 결국, 많이 자주 마시다 보면 취향이 생기고 각자 나름의 기준이 생기게 마련인데 커피도 다르지 않아요. 저도 처음에 커피를 업으로 삼아야겠다 결심하고 공부한 게 아니고, 좋아해서 즐겨 마시게 된 거에요. 다이어트를 위해 베리에이션보다는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 핸드드립 등 원두의 맛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커피를 마시다 보니 점점 원두에 예민해지게 된 거죠. 그렇게 조금씩 더 깊게 배우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 되었어요.”

바리스타 이경용은 커피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주의자이다. 품종과 로스팅 정도를 꼼꼼히 따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날의 기온과 습도 등 주변 환경의 모든 것이 커피 맛을 예리하게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매일 기계 세팅을 새로 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시로 맛을 보고 설정을 바꾼다. 그런 그가 뽑아낸 에스프레소 한 잔을 어찌 그냥 ‘커피 한 잔’이라고 표할 수 있을까. 커피 마스터가 만든 작품, 따뜻한 마스터피스 한 잔을 입 안에 머금고 혀 끝으로 가만히 굴려보았다. 상큼한 자몽향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느껴진다. 손님이 커피를 마실 때 바리스타가 의도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경용의 말이 오감으로 이해되는 순간이다.


“원두 품종과 재배 지역, 그리고 그 해의 날씨나 토양의 상태 등 모든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좋은 원두, 혹은 나쁜 원두가 나옵니다. 그래서 생산지역과 커피 품종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아요. 와인의 포도 품종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특정 품종을 인정받는 지역이 있지만, 그 외 지역에서도 같은 품종을 나름의 방식으로 잘 농사지어서 좋은 와인을 만들고 있어요. 따라서 무조건 에티오피아, 케냐 하면서 지역만 따지기보다는 각자의 취향과 기준에 맞는 품종, 지역을 찾는 것이 중요해요. 물론 원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로스팅해서 누가 어떤 기계를 사용하여 내리는 지도 매우 중요하죠. 커피 맛을 이루는 세 가지, 원두와 바리스타, 그리고 좋은 장비. 이 세 가지만큼은 절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나갈 겁니다.”

시티 보이 프로젝트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매일을 사는 사람이라면 휴가는 필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에게 휴식은 필요하다. 휴가도 휴식도 마땅치 않아 헤매고 있다면, 연남동의 잠자는 숲으로 짧은 휴가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진지한 표정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는 바리스타 이경용을 만날 수 있을지도.


2017년 7월 27일 목요일.


글_ 황은솔

사진_ 이현재

영상_ 송치영

협조_ 플레이버 www.flavr.co.kr | 파인드모델 www.findmodel.co.kr


슬리핑 포레스트_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41길 31 2층

@sleeping_forest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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