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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씩식이 Aug 10. 2017

열정 같은 소리

서른넷, 소셜 에이전트 신동환

널어놓은 빨래가 채 마르기도 전에 돌아올 줄은 몰랐다.


스물다섯, 남들보다 조금 늦은 졸업을 앞두고 있던 봄이었다. 도피성 짙은 어학연수를 다녀온 직후였고, 고3 음악시간처럼 강의시간은 취업대비 자율학습 시간으로 바뀐 마지막 1학기. 다분히 불안하고 달뜬, 어리고 어리숙한 나이. 취업 원서는 대기업으로만 냈다. 공대를 졸업하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먼저 졸업한 동기들이나 함께 졸업하는 사람들 중에 중소기업으로 원서를 내거나 창업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이 안 된다면 차라리 대학원 진학을 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제 자식들 취업하면 한 숨 돌리겠지 기대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에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긴 때였다. 꿈이라던가 적성 운운할 겨를이 없었다. 

나의 스펙이 요구 조건에 부합되면 일단 이력서를 보냈다. 몇 군데나 보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1학기와 여름방학은 끊임없는 자소서 작성과 면접 준비로 가득 채워졌다. 달력에 빨간 글씨로 마감 날짜를 적어두었는데, 숫자보다 글자가 더 많았다. 취업의 성패가 슬슬 갈리기 시작한 초여름 즈음, 길어지는 취업 전쟁에 진이 빠져 울산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마음을 쉬러 갔다. 장마가 시작된 6월 초, 쉬러 간다고는 했지만 마음이 그렇지 못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일요일 아침,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모녀는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방 문을 있는 힘껏 꽝 닫고 들어가 집히는 물건을 모두 배낭에 쑤셔 넣었다. 우산도 없이 집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기차역으로 달렸다. 자취방에 도착해보니, 울산으로 떠나기 전 널어놓은 빨래가 여직 축축했다.

합격 메일은 발표 예정일보다 하루 빨리 왔다. 기쁨보다는 안도가 컸다. 대기업이라 다행이다 생각했다. 그걸로 된 줄 알았다. 다들 목 빠지게 고대하는 대기업 공채 사원증에 어색한 증명사진만 박아 넣으면 인생이 탄탄대로일 줄 알았다. 첫 월급을 보고도 그랬다. 수습기간이었는데도 나보다 한 해 먼저 사회로 나가 일을 하던 대학동기의 월급보다 곱절이 많았다. 그게 그렇게 행복했다. 돈이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했다. 2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미용실을 다니고, 매주 목요일엔 손톱 관리를 받고, 백화점의 패션 브랜드에서는 신상품 입고 연락이 왔다. 카드 한도는 자꾸 늘어났다. 아빠에게 생활비를 타 쓰지 않아도 되고, 격월로 나오는 보너스를 현금으로 뽑아서 부모님께 가져다 드리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빨래가 마르는 한 나절의 시간만큼도 마음이 편하지 못한 일을 하겠다면, 그건 틀린 일이 아닐까. 남들이 부러워하니까, 다들 그렇게 사니까, 하는 말들이 정당성을 부여하는 걸까. 당신은 그렇게 사는 게 정말 행복한가.

캐스팅 에이전시 파인드모델의 창업자이자 대표인 신동환은 대학 졸업반 시절 이력서를 준비하고 과장된 자기소개서를 쓰는 대신 ‘뭐 재미있는 거 없을까’에 대한 답을 찾는데에 골몰했다. 우리나라에 아이폰3가 막 출시되었고 스마트폰 앱 시장이 활기를 띄기 시작한 때였다. 마침 친구 중에 디자이너와 개발자도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스타트업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스물여섯살의 청년 셋이 개발한 첫 번째 앱은 ‘아임 클락’이라는 시계 앱이었다. 아이폰에도 시계 앱은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안드로이드 앱에 비해 사용자 기반의 커스터마이징이 되지 않았고, (믿기 힘들겠지만) 미적으로도 사용자 만족도가 낮은 편이었다. 신동환은 단순히 시간만 알려주는 것을 넘어 디자인 기반의 시계 앱을 만들고자 했고, 사용자 경험과 앱 환경에 감성을 녹이고자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이를테면 날씨의 변화에 따라 앱의 배경이 바뀌거나, 그 날의 날씨와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들려주는 등이다. 음악은 신동환과 두 친구들이 직접 아이폰의 가라지밴드 앱으로 작곡을 했다.

신동환은 이때를 회상하며 배고프고 힘든 시기였지만 즐거웠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이야 몇 개의 문장으로 압축해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열정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젊은 날의 치기가 마냥 즐거울 리가 없다. 아임 클락은 사용자들의 공감을 얻는 데에 성공하여 아이폰 앱 스토어 1위도 할 만큼 인기가 많았는데,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 꼭 수익으로 연결되는 때가 아니었다. 이 외에도 대학의 어학교육원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한국어를 공부하는 게임 앱을 개발하기도 했다. 돈은 많이 못 벌었지만, 일찌감치 아이티 기반의 스타트업을 운영하며 현장에서 몸으로 배운 것이 많다. 그리고 지금 신동환은 1,700명이 넘는 모델, 연기자, 엔터테이너의 프로필을 보유한, 다양성 측면에서는 국내 탑이라 할 수 있는 캐스팅 에이전시 '파인드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4년 전, 앱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는 IT 기반의 플랫폼 사업을 하고 싶었던 신동환은 남들이 많이 하지 않는 시장, 앞으로 성장할 분야가 뭘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에이전시 업계와 무관한 일을 하던 당시에도 지인 중에 모델이나 연기자 지망생이 많았는데, 그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업계의 좋지 않은 면들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열정을 담보로 사기를 치거나 꿈을 밟아버리는 나쁜 사람들, 열정 페이 운운하며 포트폴리오 한 장 추가할 수 있는 걸 감사히 여기라 말하는, 겉만 반지르르한 사기꾼들에게 아끼는 동생들이 당하는 게 너무 싫었다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며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신인의 가능성과 재능을 키워주기보다는 그 열정을 이용해서 합당하지 않은 가격으로 막 부리는 분위기가 시장 자체에 조성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동환은 시장에 만연하게 깔려있는, 열정을 담보로 재능을 갉아먹는 이 분위기를 뒤바꾸고 싶었다. 그때까지 그의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에이전시 관련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스스로 어떤 일을 잘 하는지, 그리고 어떤 일이 필요한지 계속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오게 되었다고.

 파인드모델 설립 초기에는 소속 모델들을 위한 구인 구직 서비스로 시작을 했는데, 지금은 단순 모델 에이전시의 형태를 넘어 종합 엔터테인먼트 성향이 강한 서비스로 확장해나가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광고 에이전시와 모델 에이전시가 결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프로필이 등록된 모델, 엔터테이너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재능은 있는데 소속사가 없어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모델들을 서포트해주고, 경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일거리를 찾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열정을 다해 일한 모델들이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중재인의 역할을 한다. 그동안 모델들이 열정 페이 운운하며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고, 더 나은, 그리고 더 많은 캐스팅 기회를 갖도록 도와주는 등용문이 되어준다. 이렇게 개선된 구인구직 시스템을 통하여 모델뿐만 아니라 클라이언트에게도 베네핏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광고주가 특정 이미지를 가진 모델을 원할 때 파인드모델을 찾으면 캐스팅에 소요되는 시간과 품을 줄일 수 있음은 물론이고, 1,700명 이상의 프로필이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딱 맞는 이미지를 찾을 확률이 높아서 결과적으로 광고주의 만족도도 경쟁 업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파인드모델 초기에는 프로필을 등록할 모델 한 명을 설득하는 데에 꼬박 하루가 걸렸어요. 그렇게 백 명, 이백 명 등록하고 나니 조금씩 수월해졌고요. 지금은 1,700명이 넘는 모델, 연기자, 크리에이터, 엔터테이너의 프로필이 파인드모델의 풀(pool)에 등록되어 있어요. 1,700명 전부를 정확하게 다 기억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자부할 수 있는 건 이 중 적어도 70%는 기억한다는 거예요. 단순히 이름과 얼굴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잘 하는지도 다 기억해요. 이게 파인드모델의 가장 큰 재산이에요. 기계처럼 프로필 저장하고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진심으로 이 사람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거죠.”

신동환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사람을 보는 눈이 다른 사람에 비해 예민하지 않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서울살이 1년이 조금 지난 나에게 아직도 서울이라는 도시는 차갑다. 상처는 항상 사람에게서 온다. 그런데 늘 새로운 얼굴을 맞대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라면, 인간관계에서 실패할 확률이 현저히 낮지 않을까. 신동환은 듣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을 껄껄 웃는다. 그리고는 오히려 덤덤해졌다고, 덤덤히 말한다. 상처받는 일이 왜 없으랴. 많은 사람을 만나는 만큼 사람에 상처받을 경우의 수도 커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람이 나한테 왜 그랬을까’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한 것이 내가 상처받을 일인가’ 하는 쪽으로 관점이 변했다고 말한다. 사람을 가려보기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덤덤해진다고.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사람은 제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걸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상대와 내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개인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방대하고 다양한 프로필 보유와 더불어, 그 다양함을 품을 줄 아는 대표의 넓은 그릇이야말로 파인드모델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 아닐까 싶다.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물으니, 그는 망설임 없이 ‘신뢰’라고 답했다. 사람을 기본으로 하는 사업을 운영하면서 인간관계 말고 더 중요한 게 있다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한 번 만났던 사람들과는 일을 떠나서도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조화롭게 지내면서 일을 계속 만들어 나가는 것이 파인드모델 비즈니스의 핵심이기도 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신동환의 태생이 그렇기도 하고.

신동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모델 에이전시를 한다고 하면 화려하게 치장된 겉모습과 반비례하는 가벼운 알맹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비슷한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그와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점은, 생각이 깊고 지적인 사람이라는 것. 에이전트 업계 전반에 대한 잘못된 시선과 오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속 깊고 똑똑한 사람이다. 커피와 책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준전문가 수준으로 많이 알고 있다. 매일 아침 그는 명상을 하고 차를 마시며 스스로 다짐을 하는 시간을 가진다. 일이 아닌 인간 신동환과 그의 삶에 대한 다짐이다. 어제를 반성하고 오늘을 다짐하는 시간. 사람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고, 꿈에 값을 매기지 않고,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해야 마땅한 직업이 에이전트라면,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취업이 아닌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선배 창업가로서 한 마디를 부탁했다.


“아이디어는 누구나 가지고 있어요. 내가 정말 기발하다고 생각해도, 나만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고요. 지금 당장 잘 되는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성장하는 게 중요해요. 시간이 지났을 때에도 남아있는 것. 지금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랄까요.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버텨야 합니다.”


꿈꾸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건 기름에 활활 타오르다 검은 연기를 내며 사그라드는 불같은 열정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오래 두고 은은하게 타는, 촛불 같은 끈기일지도 모르겠다. 바람 앞의 촛불이 되기 두렵다면, 파인드모델의 든든한 가림막 뒤에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다.


2017년 8월 10일 목요일.


글_ 황은솔

사진_ 이현재

협조_ 플레이버 www.flavr.co.kr


신동환_ @findmodelkorea

파인드모델 www.findmodel.co.kr

장소 제공_ 필그림 커피 |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25길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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