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요 Sep 25. 2017

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10 인셉션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크리스토퍼 놀란이 쓴 <꿈의 해석>

<의뢰인> 사이토, 인셉션의 시작


피셔 가문의 회사와 라이벌 구도에 있는 사이토. 그는 경쟁사 오너의 아들인 로버트 피셔의 무의식을 조정해 회사를 상속 받는 것을 막으려 한다. 나아가 경쟁사의 해체까지 바라는 그는 주인공 코브를 찾아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가족들 곁에 가지 못하는 코브를 무죄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 이렇게 의뢰인의 제안을 받은 코브는 한 사람의 꿈 속으로 들어가 무의식을 흔들어 놓는 일명 <인셉션>을 시도해보기로 결심하고, 팀원을 꾸리기 시작한다.


<타겟> 로버트 피셔, 재벌가의 상속자보다는 사랑받는 아들이 되고자 했던 염원이 만들어 낸 바람개비


한편 <인셉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타겟 '로버트 피셔'. 그는 '너에게 실망했다'라는 말 만을 남기고 돌아가신 아버지 탓에 충격에 사로잡혀 있다. 따듯한 말 한 마디 없이 가버린, 예전에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덤덤했던 아버지. 역시나 본인이 죽어 홀로 남겨진 아들을 위한  배려심 따위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로버트 피셔는 마음 속 깊이 사랑받는 아들이 되고자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3단 구조로 설계된 <인셉션>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그의 무의식의 금고를 열었을때 그 안에 들어있었던 것은 낡은 바람개비 하나였다. 결국 로버트 피셔가 아버지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은  아들이 자신처럼 되기로 결심해서 '실망했다'는 말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와 함께 행복했던 시절에 찍었던 사진 속 바람개비를 불러내 와 다시 한 번 그 옛날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고자 했다.


결국 그는 아버지같은 삶이 아니라,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회사일로부터 물러난다.


<추출자> 코브, 림보에서 두 번이나 되돌아 온 생존자


주인공 코브는 림보에서 두 번이나 생존한 인물이다. 림보라는 것은 거의 죽음의 세계나 다름없다. 림보로 떨어지는 것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림보에서는 매일 똑같은 상태가 유지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꿈의 세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꿈에서도 깰 수 없다. 결국 정신의 세계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는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코브가 처음 림보에 도달한 것은 아내 맬과 함께였다. 둘은 림보로 떨어져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 살아가지만 점점 아내는 현실과 꿈을 혼동하다가, 꿈이 아닌 현실에서 자살하게 된다. 죽으면 꿈에서 깨어나는 인셉션의 규칙을 현실에서도 적용해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코브는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지명수배자가 되어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던 차에, 사이토가 제안한 <인셉션>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살인 누명을 벗겨주고, 아이들과 만날 수 있도록 미국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은 코브에게는 절대적인 가치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인셉션에서 또다시 림보로 떨어져 버린 코브. 그는 일단 다시 살아 나온다. 그러나 이번엔 꿈속에서 매번 자신을 괴롭히던 맬의 환영과 영원히 이별을 고함으로써, 아내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떨쳐 버린다.


<설계자> 아리아드네, 실타래를 감아 쥔 손. 미궁 탈출의 Key


<인셉션>은 보통의 꿈과는 달리. 완전한 무의식의 세계가 아니다. 무언가를 바꾸거나 변화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사람을 꿈꾸게 하여, 타겟이 된 사람의 무의식 안에 의식을 바꿀만한 장치들을 심어 놓고 작동시키는 것이다. 즉 <인셉션>은 꿈에서 주지시킨 특정한 생각을 실제로 믿게 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홍일점 아리아드네는 이번 <인셉션>에서 꿈의 디테일을 설계한 장본인이다. 물리, 시간, 공간이 뒤틀린 세계에 창조자적 호기심을 갖고 설계자의 역할에 충실한 그녀는 코브가 맬에 대한 트라우마와 죄책감 때문에 현실에서도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그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꿈의 3단계에서 피셔가 맬의 총에 맞고 죽어갈 때, 림보로 들어가 그를 찾아내 킥을 할 수 있도록 해서, 목숨을 구해주기도 한다. 애초에 타겟은 피셔였으므로 피셔가 죽어버리면 <게임오버>가 되는 상황에서 해결사 역할을 한 셈.


<위장자> 임스, 무의식을 뒤흔드는 연기자


아무리 무의식 중이라도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최대한 현실성있게 접근하여 타겟을 꼬여 내야 하는 팀 <인셉션>. 이 때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인물은 위장자 임스다. 그는 타겟의 주변에 있는 지인의 행동 양식을 그대로 따라하여 타겟에게 믿음을 주고, 그와 동시에 타겟에게 깊숙히 접근하여 비밀을 캐내는 역할을 한다, 피셔의 최측근인 브라우닝으로, 또한 미모의 여성으로 위장하여 피셔의 무의식을 손 안에 쥐고 흔드는 능력자이기도 하다. 


<방어자> 아서, 레벨 2를 지키는 아서왕


레벨 2의 꿈은 아서의 것. 그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팀의 방어꾼이다. 성격이 합리적인만큼, 그의 상상력은 다소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꿈은 단조롭게도 호텔 안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상상력이 곧 사람의 능력은 아니다. 그는 모두가 잠들어 있는 사이, 팀원을 지키고, 적기에 킥을 실현시켜 현실로의 복귀를 돕는다. 호텔에서 펼쳐지는 무중력 액션씬은 영화 <인셉션>의 주요 관전 포인트이기도 하다.


<약제사> 유서프, 꿈을 찾는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피리부는 사나이


약제사 유서프는 강력한 약제를 사용하여 더욱 깊은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는 인물으로, 주인공들이 레벨 3, 그리고 그보다 낮은 림보의 세계까지도 탐험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하루 종일 꿈만 꾸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서프의 작업장은 현실에 마음 둘 곳 없는 자들이 단골으로 찾는 현실피난처가 된다. 유서프가 제조한 강력한 수면제는 일종의 마약처럼 사람들이 현실을 잊고, 꿈만 먹고 자랄 수 있도록 돕는 효능을 지닌다.


<그림자> 맬,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길티 플레져


사랑스러운 아내, 림보에서의 삶에 빠져 현실과 꿈을 분간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늙어가다가 50년이 흘러 버린다. 코브는 림보의 삶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각성한 후, 아내를 현실로 데려오려고 하지만, 림보가 현실이라고 굳게 믿는 아내를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결국 코브는 맬에게 인셉션을 시도하여 림보의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는 의식을 심어주고, 림보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끊는 방법밖에 없다고 설득한 끝에, 코브와 맬은 기차에 치여 죽는 동반 자살을 통해 현실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인셉션>이 심어준 '자살'이라는 이미지는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 결과, 끔찍하게도 현실을 꿈이라고 믿어버린 맬은 코브와의 결혼기념일 날, 코브의 눈 앞에서 자살해버리고 만다. 그 후 코브의 무의식 속에 미저리처럼 쫓아다니며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려는 악녀가 되어버린 맬. 하지만 그림자만 남은 맬은 단점도 장점도 없는, 생전의 맬의 모습이 하나도 없는 쭉정이에 불과하다. 무의식 속의 맬은 실제 그녀가 아님을 알면서도, 떠나보내지 못하는 코브.


결국 코브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그녀와의 이별을 선택하지만, 사랑했던 기억은 여전히 추억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신경증의 원인과 동기를 찾아냈다. 그가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라는 것이 바로 꿈인데, 꿈을 해석하여 환자의 정신을 분석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저술한 명저가 <꿈의 해석> 되겠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꿈을 꾸는 동기는 소망이고, 꿈의 내용은 소망의 충족이라고 보았다. 유년 시절에 겪은 양육자와의 트러블, 즉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무의식의 저편으로 떨어져 평생토록 꿈의 주체를 괴롭힌다.


피셔의 무의식에 담긴 낡은 바람개비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 그것이 꿈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신경증의 원인을 분석할 수 있는 실마리로 보고, 특히 히스테리 신경증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반복적인 꿈에 대해 토로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하여 정신분석학을 새로이 다지는데 크게 기여한 요소로 삼았다.


당신이 어제 꾼 꿈을 기억하는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일까? 혹시 유아기때의 트라우마가 무의식에 남아 그것을 해소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 논란이 있지만 한낱 꿈을 단지 흘려버리지 않고 결국 한 학문을 정립하는 수단으로서 삼은 프로이트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본 단락을 마친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불러일으킨 <논란>, 그래도 팽이는 돈다?!


그들의 인셉션은 성공했을까?사이토는 살아 있나? 똑같이 꿈 속인데 왜 사이토만 폭삭 늙어버린걸까?


영화 <인셉션>은 마지막 씬, 행복한 코브의 집을 배경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끝나도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꿈 속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해주는 토템인 팽이가 쓰러질 듯 말 듯하며 탁자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팽이가 쓰러진다면 그것은 현실이요, 팽이가 계속 돌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꿈 속일 터.


관람객들은 팽이의, 코브의, 인셉션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아쉽게도 깜깜한 스크린과 다시 조우하게 된다. 오픈된 결말에 대한 아쉬움은 아마도 아내의 자살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가는, 또한 원치 않게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도망자 신세의 주인공에 대한 연민때문이리라.


누군가는 엄청난 장문의 글으로 <그래도 팽이는 돈다>고 주장한다. 열린 결말이니 자신이 이해하고 느낀 그대로 어떤 식으로든 시나리오를 써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가 끝났더라도 스크린 뒤에서, 극장 밖에서, 온라인 상에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주장을 이끌어 내는 이런 영화들이야말로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알 포인트>, <곡성>, <검은 사제들> 등 한국에도 박학다식한 리뷰어들의 코멘트를 찾아보게 하는 '논란'의 영화들이 많다. 이처럼 관람객들을 상대로 즐거운 논란 거리를 던져주는 천재 감독들의 또 다른 '논란물'을 기대해 본다.


<꿈>안에는 염원이 있다


꿈이라는 것은 꿈 꾸는 주체를 주인공으로하는 일일 드라마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안에 내재된 무의식적인 욕망이 바로 그 날의 드라마가 된다.


'나'는 곧 이 일일 드라마의 연출자이자 시나리오 작가, 캐스팅 디렉터, 주연 배우, 세트 디자이너 등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즉 꿈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만큼만 꿀 수 있다. 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번은 마주친 적 있는 사람이라는 의견도 있다. 티비에서든, 버스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갔든 우리의 뇌 속에 기억된 이미지 정보가 꿈 속에서 출력될 수도 있다는 말이니, 우리 뇌의 능력은 과연 어디까지일 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꿈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다. 꿈 속에서는 모든 이들이 합심하여 '나'의 소원을 이루어 준다. 물론 개인의 심리상태에 따라 악몽을 꾸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인셉션>에서도 꿈의 주체가 염원하는 것들이 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피셔의 경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구, 코브의 경우는 죽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고자 하는 욕구, 아리아드네의 꿈에서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시공간적 및 물리적 왜곡을 실현해 보고자하는 연구자적 욕심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을 잃지 마세요! <마지막 메세지>


그러나 결국, 꿈은 현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 속에만 빠져서 자신을 잃어서는 안된다. 꿈 속에서는 과거의 일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 또한 반영된다. 꿈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성이 없다. 결국 그들은 현실 도피를 위한 수단으로서 꿈을 이용하고 있는 일이다.


정말로 꿈은 현실 도피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잠깐 동안 현실을 마주하지 않을 뿐이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여전히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찰나의 회피 후에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게으른 자신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현실으로 돌아와 현재를 살라. 과거나 상상 따위에 얽매여 현재를 놓치지 말아라.


영화의 주인공 코브 또한 과거의 상징인 아내에 발목이 붙잡혀, 현재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 즉 아이들이나 자신의 부모, 동료나 친구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죄책감에서 도망치기위해 꿈 속으로 도망쳐 봤지만, 아내의 환영은 결코 코브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모진 말로 죽으라 한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은 훌쩍 커버리고, 아이들의 기억속에 아빠의 모습은 공백으로 남았다.


현재에 머무른다고 과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미래가 닥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 즐겁게 산다고 해도 아내의 죽음에 대한 미안함은 사라지지 않고, 되려 애틋함이 더해질 수도 있는데 코브는 아내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강박에 가까운 죄책감 때문에 현실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씬. 아이들의 웃음 소리. 잔잔한 바람과 익숙한 홈, 스윗 홈. 코브의 얼굴에 가득 차오른 환희와 기쁨이 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을 잃지 않고 현재에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말이다.


이전 10화 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9 샤이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