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언어로 이야기하는 순간이 있다.
나는 생활 잡담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물론 필요에 의하면 어찌저찌 즐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상적 잡담을 좋아하지 않는 건 말이 가고자 하는 정착지가 없을 때이다. 정신적 에너지를 최대한 보존하길 원하는 내가 굳이 시간 들여 교류성 모임에 참여한다면 그건 목적성이 있기 때문일 거다. 독서모임, 교육 프로그램, 일회성 강의처럼 말이다. 지인들을 만나면 근황을 나누고자 아무래도 사는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이와 별개로 굳이 따지고 본다면 목적성을 가진 대화가 내 취향에 맞다.
관심사가 유일하게 비슷한 지인이 있다. 나와 그 친구는 엄마라는 공통분모가 있다만, 애기는 다 때맞춰 자라겠거니 훌륭한 육아에 각별한 관심은 없어 육아 이야기는 뒷전이다. 엄마의 신분이 요구하는 역할은 각자 알아서 잘 하고 있을 일이며, 그보다는 나 개인으로서의 성장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한다. 대화는 늘 짜맞추기라도 한듯 성장에 대한 주제로 흐른다. 서로 근래 시도한 것들, 현재의 고민, 막히는 지점, 업계의 상황, 이에 따른 최선의 해결책 등이 뒤섞이며 오고 간다. 모든 지인이 내 관심사와 같은 결을 할 수 없기에 평소라면 꺼내지지 못하고 내 속에 보관되는 것들이 있다. 묵혀있던 말들이 기다렸다는 듯 분출되는 순간이다.
관심사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건 꽤나 감사한 일이다. 내가 '아' 하면 '어' 할 수 있는 쿵짝이 가능한 게 흔치만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로 거침없이 내뱉는 것들이 핑퐁 하듯 오고 가고 있자면 말 그대로 의미있는 생각이 교환되고 있음을 느낀다. 대화의 파편들이 목적을 향해가고 있듯 말이다. 지인의 말에 으레 공감해 줘야 마땅한, 그런 노력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종류의 공감이 아니기에 기계적 반응을 할 필요 또한 없다. 관심사가 겹칠 때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는 느낌이 온다. 대화라는 것은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지만 정작 늘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기에 관심사를 같이 한다는 것, 즉 '같은 언어' 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가만 보면 감격스럽다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