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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Oct 06. 2020

다시 멜번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네


그렇게 오빠가 합격하고 나서 양가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박사 졸업 후 연구원 생활 6개월만에 교수가 된 건 정말 일찍 된 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큰 경사였다. 모두가 축하한다고 하루종일 카톡이 오는데 나는 뭔가 공허했다.


물론 남편이 논문도 많이 쓰고 연구 실적도 좋아서 교수가 된 건 정말 행복하고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나도 그건 정말 기뻤다.


그런데, 그러면 나는. 내 꿈은.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애초에 내가 호주 유학을 올 때, 해외 정착이란 단어는 아예 생각도 없었다. 한국에서 즐겁게 강사 생활을 하다가 조금 더 배우고 내 학원을 차리고 싶어서, 아니면 공부 하다가 공부가 적성에 맞으면 박사 진학을 해 볼까 등등 내 즐거운 미래를 계획하며 왔는데, 얼떨결에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고 이렇게 남편 따라 중동으로, 그리고 다시 호주로 가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지.


심각한 얼굴로 내 이런 마음들을 담아 오빠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자 남편은 더도 덜도 말고 딱 3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Monash University는 교통공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교기 때문에 여기서 3년만 교수로써 선진 대학의 경험을 쌓고, 3년 뒤에는 미련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하겠단다.


못 미더웠지만, 솔직히 별 도리가 없었다. 결혼 한 마당에.. 교수가 된 남편의 앞길을 막을 수도 없고.. 이래저래 내가 3년이든 5년이든 참아야 할 것 같았다.


다시 호주라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며칠 뒤.


설상가상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소린지, 오빠는 내게 더 희한한 소식을 전했다.


모나쉬 대학에서 중국 Suzhou (쑤저우, 상하이 옆의 작은 도시)에 캠퍼스를 만들어 대학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신임 교수는 그 곳에 2월부터 7월까지 5개월 간 한 학기를 파견 가서 대학원 수업을 운영해야 한단다.


중국 쑤저우라고??? 처음 들어 보는 도시다 싶었는데 한국에는 '소주'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예쁜 도시란다.




멜번보다 더 황당했다.


그때가 11월이었다.


카타르 생활과 연구직을 12월 초까지 정리하고, 12월 중순에서 말까지는 한국에서 보내다가, 1월에는 호주 멜번으로 가서 신임 교수 오리엔테이션과 ID카드, 월급 계좌 등등 관련 업무를 보고, 그 곳에서 중국 비자를 취득하여 2월에 중국 쑤저우로 가야 한단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지끈지끈 아파오던 머리가 폭탄이 팡팡 터지는 듯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중국은 또 무슨 말인지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12월부터 국제선 비행기를 얼마나 타야 하는 건지 감도 안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멜번은 인천과의 직항 노선 조차 없었다....^^


아....


내 삶이 마치 바닷물 속 해초 같았다.


파도 치면 이리 흔들리며 저리 흔들리다가 결국 뽀골뽀골대며 해변으로 밀려와 축 늘어지는 그런 해초.... 나는 파래다... 나는 미역이다. . 나는 흐믈거린다....

그러다 해 나면 말라빠진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카타르 탈출을 그렇게도 바래서 그 소원이 이뤄졌는데, 그리고 남편이 정말 좋은 대학에 합격했는데, 이 상황에 대고 불평불만만 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이 아닐까 싶었다.


마음을 다시 긍정적으로 먹고 힘내서 남은 카타르 생활을 즐겁게 마무리지었다.





그렇게 2개월 뒤.


우리는 정말 많은 우여곡절 끝에 멜번의 임시숙소에 도착했다.


멜번은 낯설었지만 호주 생활은 익숙했으므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브리즈번보다 훨씬 큰 도시라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았지만 차가 없는 탓에 학교-집-슈퍼만 왔다갔다 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오빠가 같은 과 교수를 소개시켜준다고, 그도 이번 학기에 중국 쑤저우에 가게 된다며 미리 친해지자고 우리는 저녁 약속을 잡았다.


중국 사람이었고, 영어 이름은 테리.


Terry Liu.


테리는 유쾌하고도 재밌었다. 쑤저우 생활을 자기가 많이 도와주겠다며 즐거운 일이 많을거라고, 교직원에게 제공되는 아파트도 정말 좋다며 긍정적인 이야기를 잔뜩 해 주었다. 그러고는 내게 중국어를 꼭 배우라고 권했다.


-켈리, 중국어는 쑤저우에서 필수야. 영어는 안 통해.

-그래? 근데 한 번만 가는 거고 몇 달만 있을 텐데 뭐. 어떻게든 살아지지 않겠어?


천진하게 대답하는 날 보고 테리가 한 마디를 했는데,

 이 한 마디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한 번만 간다고? 켈리, 노... 매년 가는거야. 나도 지금 3년째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뭐라고?? (나 & 오빠 동시에 소리지름) 그럴 리가 없어, 한번만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야. 너네가 뭘 잘못 안 거야. 매년 2월에서 7월까지는 중국에 가는 포지션이야.


믿기지 않는 발언이었다.


집에 와서 황급히 오빠의 계약서와 이메일 등 모든 걸 확인 해 보니 테리 말이 맞았다.


오빠의 포지션은,


매.년.


중국 쑤저우 캠퍼스에 2월부터 7월까지 대학원 프로그램을 위해 중국에 있어야만 하는 포지션이었다.


오빠가 그걸 한번만 가야 한다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매년 호주와 중국을 오가며 살아야 한다고?

도대체가 이게 무슨 말이나 되는 소린지, 있을 법 한 이야기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한번 다녀 오고 안 간다 그러면 어떻게든 대체 인력을 뽑아 주겠지...


말이 되나 이게.. 말이 되냐고.






그땐 진짜 몰랐다.


그 후 5년 동안, 매년, 반년은 중국, 반년은 호주에 머물면서 생활하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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