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학교는 길만 건너면 있고, 학생들은 모두 영어로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 오빠의 생활은 이때부터 학교-집을 오가며 오히려 편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낡아빠진 우리 아파트는 듣던거와 달리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당장 필요한 게 너무 너무 많았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냄비, 국자류, 수저, 그릇, 발매트, 휴지, 티슈, 비누, 세제, 수세미, 걸레, 청소기, 키친타올, 세탁세제 등등등... 정말 아파트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 살림을 구비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정말 삶이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정말 당장 필요한 것만 뽑아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마트에 가서 장을 봐야 하는데 마트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
-루루야!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대형 마트에 가야하는데, 어제 도착해서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어.
-물론이지, 지금 네 주소를 알려줘!
한자의 특징은, 보는 것을 입력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ㅎㅎ
알파벳은 모르는 단어라도 하나하나 화면에 입력 할 수가 있는 반면 한자는 따라 그릴 수도 없고 ... 모르는 글자라면 아예 입력이 불가능한게 너무 불편했다. 나는 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사진 찍어 루루에게도 보내 주고, 핸드폰 사진첩에도 보관해 두었다.
루루에게 집 주소를 보내주자 루루는 지도를 찾더니 금새 가장 가까운 마트의 위치와 이름을 중국어로 적어 주었다.
-이거 한국으로 치면 이마트 같은건데, 차로 10분이면 금방 가! 너네 집에서 되게 가까워. 그냥 북쪽으로 곧장 직진하기만 하면 있네.
-너무 잘됐다. 걸어가기엔 멀겠지?
-응, 걸어가면 50분 넘게 걸려서 안돼.
-그럼 택시 아저씨한테 이것만 보여주면 되겠지?
-그럼, 보면 바로 알아. 그러고 올 때는 너희집 주소 보여주면 되구. 걱정마, 할 수 있어!
그리고 루루는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면 통역까지 해 주겠단다.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에 우리 집 주소도 있고, 목적지도 있고, 필수품 쇼핑 목록 리스트까지 있었다.
루루가 알려줬던 마트 <오샹>
자, 길을 떠나 보자!!
집 앞으로 나가 용감히 택시를 잡았다.
에메랄드빛 덜덜거리는 낡아빠진 택시 한대가 잡혔다.
그때 흔했던 쑤저우의 낡디낡은 택시들
기사님에게 핸드폰에 저장 해놓은 마트 이름이 적힌 사진을 보여주자, <오, 오우쌰앙~~> 하면서 자신있게 운전을 시작한다. 느낌이 좋았다.
그러곤 백미러를 보면서 내게 뭐라뭐라 말을 건넸지만 당연히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한궈런 한궈런> (한국인이라는 뜻)이라고 대답하니 기사님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단 걸 깨달으셨는지 곧 포기하셨다.
마음이 좀 편해져 문에 기대서 창 밖 풍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앙상한 나무가지들만 스쳐 지나갈 뿐 딱히 볼 만한 풍경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분명히 출발한 지 10분은 훨씬 지났는데 기사님은 차를 세울 생각은 않고 어딘가로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황급히 지도를 켜서 보니, 나는 이미 호수를 건너 와 이상한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우리 집 서쪽 편에는 두슈후라는 정말 큰 인공 호수가 있었는데, 분명히 루루는 마트가 집에서 직진만 하면 나오는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기사님은 서쪽의 엄청 큰 호수인 두슈후까지 건너서 굉장히 멀리 온 상황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중국의 인신매매인가...? 나란 인간은 도대체가 말도 안 통하면서 뭐하러 혼자 장을 보러 간다고 택시를 탄 건가..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
순간 너무 무서워져 바로 다시 루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루루야 루루야, 난데, 지금 좀 이상해.
-무슨 일이야?
-아까 너가 분명히 10분 걸린다고 했잖아, 근데 지금 거의 25분째 달리고 있고 방향도 완전 반대야. 주변은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없어서 나 너무 무서워.
-진정해, 괜찮을거야, 기사님 좀 바꿔줘봐.
스피커폰을 켠 채 기사님께 핸드폰을 주자 루루와 기사님은 한참동안 통화를 했다.
다시 전화기를 넘겨받자 루루는 한국의 이마트처럼 중국의 오샹도 체인점이라 지점이 여러개인데 기사님은 우리 집 근처의 오샹은 몰랐고, 시내 한복판에 제일 큰 오샹으로 가고 있는 중이란다.
훗날 알게 된 내가 간 곳의 진실: 왼쪽 하단의 빨간 숫자 1= 우리집 위치, 숫자 2=원래 가야할 오샹의 위치, 숫자3=아저씨가 날 데려다 준 오샹... 택시 아저씨 치사빤스
멀리 와서 마음은 불안했지만, 아주 큰 마트라니 그건 마음에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트에 도착하니 아닌게아니라 마트는 정말로 컸다.
얼마나 컸냐면, 마트에는 계산대마다 1번, 2번 하고 숫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게 자그마치 99개나 있었다... ;;;
이게 바로 대륙의 스케일이구나...
나는 놀란 입을 얼른 닫고 쇼핑을 시작했다.
필수품 목록을 적어왔건만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얼마나 필요한 게 많은지 눈 닿는 곳, 손 닿는 곳마다 살 것 천지였다. 그렇게 마트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카트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저히 다 들고 갈 자신이 없어 정말 필수품이 아닌 건 다시 내려놓고 또 솎아낸다고 그 큰 마트를 두세바퀴는 더 돌았다.
계산까지 끝내자 정말 기진맥진이었다. 사람은 얼마나 많으며 길은 또 얼마나 복잡한지... 당이 떨어지고 목도 말라서 눈앞에 보이는 밀크티 가게에서 손짓 발짓으로 밀크티를 한잔 겨우 주문해서 원샷을 했다. 그리곤 내 덩치만한 짐 봉다리 두개를 낑낑대며 들고 택시를 잡으러 길가로 향했다.
마트 주변이라 그런가 택시는 정말 많았다.
택시 타기 전에 미리 주소 적힌 사진첩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휴대폰이 꺼져있었다.
아... 불길했다.
당시 내 아이폰은 겨울만 되면 배터리가 많이 남았어도 혼자 꺼져서 가끔 벽돌이 되곤 했는데 다시 충전기에 연결하기만 하면 곧장 켜져서 불편해도 그냥 쓰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설마 아니겠지. 지금 이 순간에 니가 벽돌이 되면 안 돼... 제발.....
심장이 철렁했지만 심호흡을 하고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왜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는지... 내 아이폰은 나도 모르는 사이 하필 지금 벽돌이 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안.켜.졌.다.
어떡하지?
당황해지자 머리가 굉장히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Q. 여긴 어디인가?
A. 오샹 마트인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는 모른다
Q. 우리 집은 어디인가?
A. 폰이 꺼졌기 때문에 모른다.
Q. 집으로 갈 수 있는가?
A. 현재 위치도, 목적지도 모르기 때문에 못 간다.
Q. 집 주소 말고 집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있는가
A. 낡은 아파트다. 여기서 멀다. 아파트 이름이 한자 4글자이다.
오잉? 아무 쓸모짝에도 없는 Q&A 같으니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망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휴대폰이 켜지지 않는다면 내가 집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럼 휴대폰 가게를 찾아보자, 거기서 어떻게 충전기에 한번 연결만 해도 켜질테니, 휴대폰 가게나 휴대폰 충전기만 어떻게 구할 수 있으면 된다.
주변을 휘 둘러보니... 또 아까 그 거대한 마트 말고는 왕복 8차선 도로만 있을 뿐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한 곳에는 휴대폰 가게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난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짐과 함께여서 이동성이 좋지 못했다.
평일 낮이라 그런가 마트에는 장 보러 온 아주머니들이 많았고, 나는 길 가는 아주머니들을 붙들고 영어를 하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영어 한마디만 할 수 있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테니까...
- Excuse me. Do you speak English?
- 쏼롸쏼롸 (중국어 + 빠른걸음으로 도망)
-Excuse me. Do you have a charger? (휴대폰을 보여주며 불쌍한 표정으로 충전기 꽂는 시늉을 함)
-쏼롸쏼롸 영어몰라 저리가 (빠른걸음으로 사라짐)
3-4명에게 저렇게 퇴짜를 맞고 나니 더이상 물어 볼 자신도 없어졌다.
짐을 들고 마트 주변을 동서남북으로 걸어다녀 봤지만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두유스픽 잉글리쉬? 까지 시전함) 아무것도 보이는 것도 없고 사람들은 영어 하는 날 도망다니기 바빴다. 솔직히 경찰서라도 보이면 들어가서 미아라고 주장하려고 생각도 해 봤는데.... 경찰서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