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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이 크는 나무 Oct 06. 2023

가을에 시 한편 어때요?


『시와함께』는 창작 중심의 계간 시문학지이다. 주의를 끄는 캐치프레이즈 대신 알맹이가 꽉 찬 내용으로 우리 시의 *위의威儀를 지키고자하는 알찬 문학잡지이다.

 *우의威儀 : 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 예법에 맞는 몸가짐, 불자(佛者)가 지켜야 할 규범. 계는 깨끗하고 착한 습관을 익혀 지키기를 맹세하는 결의를 이르며, 율은 불교 교단(敎團)의 규칙을 이른다.


요즘은 시를 즐겨 읽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즈넉한 숲길 벤치에 앉아서,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시 한편 읽고 싶다면  시와함께 를 펼쳐보면 많은 위안이 될 것이다.




겨울은 아니더라도


                                                김병호



빨래를 넙니다

손바닥만 한 속옷과 솔기 터진 수건과 뒤집힌 양말

어떤 싸움이 공평하게 지나갔는지

세 식구 옷가지에 눈꽃이 가득합니다


다시 헹궈야 하나 마르면 털어 날려야 하나

망설이는 한참, 어딘가에 닿으리라는

바람도 없이 허공도 없이 젖은 몸으로

다투던 어떤 생이 생각납니다


거기, 누구 없어요?


빗방울인지 입술인지 알 수 없는

숨결은 어떤 눈빛이었을까요

술래도 없이 숨은 아이처럼

나를 놓친, 나는 어디를 날고 있을까요


창밖으론 눈이 펄펄 내립니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슬픔처럼

허기가 집니다


닫으면 갇히는 마음은 왜 어려울까요


발자국이 말라갑니다

아직 혼나지 않은 일이 남은 듯

마음이 길쭉해지고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거기, 누구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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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임문혁



외할머니 시집오실 때

증조할머니는 딸 품속에

조약돌 하나 넣어주셨단다

돌이 말하면 비로소 너도 말하렴

외할머니는 그때부터 돌이 되어

입을 닫으셨단다


우리 어머니 시집보내실 때

외할머니는 딸 품속에

모란꽃잎 자수를 넣어주셨단다

모란이 하는 말을 따라서 하렴

그때부터 어머니는

모란 입술 같은 말만 따라 하셨단다


딸아, 이제 네 차례가 왔다

네 품속에 무얼 넣어 보낼까?

시 한 편 곱게 적어 넣어준다면

네게서 새록새록 시가 피어날지도 모르는데

시처럼 노래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딸아, 이제 네가 시를 완성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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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김선영



비취의 해일 속으로

뛰어드는 아이들은 잠시

비취 옷 한 벌을 입었다가

벗어던지고

바다를 찾으러 떠난다

파도가 젖은 비취의 벗은 옷들을 두 팔에 거두어 돌아간다

바다는 재재빠르게 어디로

사라졌는가

나는 기다린다

이 물렁한 광물성의 광장을

발로 차듯 가르고 나와

우레처럼 울음 울

첫 순결한 큰 짐승을

창세기 첫 장을 처음 읽을 때처럼

순결한 심장의 두근거림으로

첫 생명의 바다





                                      전 원 책



1

비 그치자 마당 한가운데 훤히 보름달이 떴다.

긴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은 벌레들 울음

넌 왜 우느냐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것이 저 절절한 사연만이 아닐 텐데

끊어질 듯 끊어질 둣 울음은

담장 안에서도 멀기만 하다.

하필 이런 날에 달은 왜 이리 지척인가.

나뭇잎들 이리저리 취해 흔들린다.

문을 열어두어도

집안에 새삼 그득한 달은 그저 달일 뿐

그리운 얼굴은 이제 없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게 어디 환장할 일인가.

소식 끊어질 때마다 잊히던 세상사 인연이란 것들

그저 그런 헛것들

그런데도 기어코 울음은 길게 남는다.



2

늘 아버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제 당당하게 집으로 간다.

오래된 집 툇마루에 한참을 더듬다가

문을 열면 아버지는 언제나 거기에 있는 듯이 잠들어 있다.

함께 누웠던 방에는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 같은 것

그 기억이라도 행여 놓칠세라 문풍지가 운다.

이 나이에 서럽지 않은 게 무엇이 있으랴

어렴풋이 보이는 그리운 것들

낡은 것들, 헤어진 것들, 마침내 떠도는 공기조차 눈물겹다.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텐데 귀 기울여 무엇하리.

이제 남은 싸움은

나뭇잎을 구르는 빗방울처럼

위태롭게 기억의 끝에 매달리는 일이다.

가만히 문을 열고 아버지 헛기침을 비집고 물어본다,

아버지는 어디쯤 멀어져 있을까?

그리운 것들 다 어디 갔는가.




그러고 보니 집이 자꾸 비어간다



* 요즘 연작시 ‘집’을 쓰고 있다. 오늘 드리는 시는 그 첫 부분이다. 집은 돌아갈 곳이다. 내 모든 기억이 쌓인 낡은 창고다. 끊임없이 흐르는 강이면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이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지만 우주가 빛보다 더 빨리 달아나는 ‘팽창’을 멈추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때 시간은 거꾸로 흐를 터이므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지은 죄를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이가 더는 빚지지 않아야 되는 나이란 걸 알았다. 더는 죄짓지 않아야 할 나이란 걸 알았다. 지금 빚지고 죄지으면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집’을 쓰면서 시는 노래이며 허투루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다시 믿게 된다.


* 이 나이가 되면 그 기억의 강가에 자주 간다. 오래된 집 문을 자주 연다. 미운 사람, 그리운 사람, 때로 잊힌 사람, 잊으려 했던 사람, 마지막으로 잊힐 수밖에 없던 이까지 만난다. 반가워한다. 그들이 내게 묻는다. ‘고작 이런 시를 쓰려고 그 많은 시간을 헤맨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동안 인생을 낭비했다고 고백한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내 삶의 최선이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뭘 노래하겠는가? 눈앞에 흘러가는 울음조차 간수하지 못 하는 주제에 말이다. 삶은 원래 슬픔이다. 그러고 보니 집이 자꾸 비어간다. 방의 주인이 떠나가고 미운 정마저 잊힌다. 다시는 읽지 않아도 될 책들이 그 방에 가득하다. 인연은 이리 끝나는 것이다. 나는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사랑했노라고 고백한다.


* 기억의 집을 돌아나오면 거기 내가 지은 또 다른 집이 있다. 아직은 허물어질 수 없다는 듯이 집은 때로 완강해 보인다. 사람들은 이 집을 찾아온다. 함께 뭔가 도모하기도 하고 심지어 반역을 꿈꾸기도 한다. 그곳에서 함부로 하는 일이란 ‘밥을 먹는’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집이 아니다. 내가 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묻고 싶다. 왜 밥을 먹는 곳은 쉴 수 없는 곳인가? 내 집은 어디 있는가?


* 죽은 이들은 말이 없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뺏은 것을 되돌려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작으로 쓰는 ‘집’은 그런 ‘되돌려 준 이야기’를 하는, 내 처절한 고백이 될 모양이다. 나는 고해告解하듯이 내 죄를 고백하고자 한다. 과연 그런 고해는 ‘노래’로 남을 것인가? 그러고 보니 ‘시’를 쓰는 일도 나에겐 과분한 ‘퍼포먼스’다. 그저 누군가, 실체 모르는 것을 부둥켜안고 한바탕 쏟아내면 될 일을 왜 이리 격식을 따져야 하나? 그래서 시를 쓰는 일도 나에겐 이제 사치가 되었다. 젊은 한때 목숨을 걸었던 시들이, ‘시의 집’들이, ‘시의 사원寺院’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 그리운 것들은 사라지고 없다고 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다들 떠난다. 다들 집으로 간다. (전원책) _ 시와함께 가을호(제16호)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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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기


                                 이 무 권


숨어 있던 별들이 밤의 보폭에 맞춰 얼굴 내밀 듯

철든 코스모스 꽃망울이 하나둘 깨어난다.

개미취 긴 허리가 꺾인 채 보라색 웃음을 날리고

사마귀 암컷의 배가 만삭으로 부풀어가는 어름

우화羽化의 기미도 없이 잠자리 떼 높이 날아오른다.

계절의 경계를 주름잡는 아무의 속셈도 없이

저체온증 아침이 바르르 떨고, 멈칫멈칫

어정대는 여름의 뒷덜미가 비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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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보면


                                                   한 성 근



아물지 않는 생채기를 다독인 손길이 분주하다

떠돌다 간 발걸음은 때마침

어스름 저물녘을 기막히계 바라다보고

어렵사리 달무리진 해묵은 목록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맨 처음 모습 되찾아보려 안간힘 써 보지만

세월은 지문도 없는 지난한 흔적을 쓸어 낸다

조각난 기억들이 자꾸만 제 눈금 짜 맞추려

한 생애가 고스란히 들썩거리는데

지척에서 울먹이며 애씌우는 눈빛으로

우연처럼 초췌해진 모습에 놀라 지나쳐 갈 때면

바람의 손이 가리킨 길모퉁이에서

뉘 부르는 소리 오랫동안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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