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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이 크는 나무 Dec 27. 2023

오늘 시 한편 어때요? 시와함께 ~



오늘처럼 스산한 날이면 따뜻한 커피한잔이 생각난다. 조용한 카페에서 시 한편 읽고 싶어지는 날~~

그동안 열심히 편집한 #문학잡지 #시와함께 겨울호가 출간이 되었다.


편집과 디자인 일이 나의 본업은 아니지만, 내가 시를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기에 이 일을 놓치 못하고 있다. 


1년에 4권~~ 계간 #문학잡지시와함께 !! 이번 겨울호에도 참 좋은 글들이 많다. 



원로에서 신예 시인까지 20인의 시를 보는

임지훈·염선옥 젊은 시각 視角


달력에 그려진 수선화


                                                          김승희


나의 친구

고독사 전에도 고독했고

고독사 후에도 고독하다

애너벨 리처럼 싸늘하게 죽었다


그 방에 찢어진 달력이 신문지와 함께

뒹굴고 있었는데

막상 벽에 걸린 달력에는

샛노란 수선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3월, March라고 또렷하게 써 있었다


노란 수선화

노란 프리지아

우리는 3월의 봄꽃을 좋아했지

차가운 대지를 뚫고 총알처럼 올라오는 샛노란 꽃들

냉수 속에 몸을 떠는 노란 새싹들

가난과 고독이 산을 이루는 동안

친구는 홀로 달력 밖으로 길을 나섰네

수선화는 꽃샘바람에 시달리며 피는 꽃

몰려오는 찬바람을 두 팔로 밀치며 피어나지

영하 50도의 불꽃처럼


확실히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우리는

고독사를 한 친구의 고독을 새로 가지게 된 것이다

영하 50도의 불꽃을 지닌 수선화로 함께 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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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하자

                                           

                                               류성훈


모레 또 뵙겠다는 인사는 발버둥

쳐다보기도 싫은 쇳덩이를 들었다 놓으면서 손보다 

손잡이가 더 많은 세상이 슬그머니 수목장을 떠올린다 

어떻게 죽을지 상상하며 무사히 잠드는 곳으로 무거운 걸음들을 옮겨왔지만 죽기는 먼 듯하고 더 멀어질 것을 

일상,이라 부르며

더는 약해지지 않겠다는 불완전 연소, 더는 만나지 않기로 할 뿐 아무도 보낸 적 없는 나는 

어디에 서서 나를 불러낼 헛기침을 할까 


좀 더 많이 다치게 하기 위해 유리병에 인화성 물질을 채워 넣으며 촌스럽고 구수한 미소를 나누던 선배들과 좀 더 효과적으로 내려치기 위해 장봉에 모래를 채우고 무전을 기다리던 동기들이 빗속에서 사발면을 먹던 힘의 어디쯤 우리의 일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엄마와 아빠가 살던, 그들이 떠나온 곳 군복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아 나는 거기서 뭘 타고 왔는지


우리는 그래도 다시 뵙기로 해요 그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차가운 중량을 올리면서 좀 더 건강한 기약을 걸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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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서정혜


끓어 넘치는 주전자 뚜껑을 열고

스위치를 잠근다.

기포가 잦아들며 조용해진다.


보글대는 소리는 어디 갔나.

주전자 속을 들여다보며

나는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움도 스위치를 잠그면

열기가 가라앉게 될까

100°C를 오르내리는

그리움에는 스위치가 없다.


펄펄 끓는 가슴에 

맹렬히 대숲을 건너가는

바람 소리가 난다.

마음 여기저기 열어젖혀도 

열기가 식지 않는다.


힘에 부치는 추억,

못난 되풀이 

밤낮이 바뀐 날들

이제는 버겁고 지루하다.


다시 주전자에 물을 채운다.

전원을 꺼도 

뜨거운 열기 100℃를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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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그린 만다라 

                                                          정끝별



눈이나 모래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릴 적 나도 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티벳 승려들은 돌을 갈아 그 가루를 물들여 그림을 그린다

갈수록 좁아지는 대롱에 색색이 돌가루를 넣어 대롱 한끝 한끝에 숨을 불어넣는다


가시인 듯 촉수인 듯

대롱 끝에서 피어나는 다반사의 만화경 


거기서 누군가 울고 있다 나도 때때로 눈물로 그림을 그린다 죽어가는 엄마를 요양병원에 두고 올 적 엄마 눈에 피었던 만단정회, 자주 와!


몇 명의 승려가 몇 날 며칠의 기도처럼 그려낸 그림은 그대로 쓸어 담겨 강물에 뿌려진다


돌가루에 숨을 불어, 없던 꽃을 피워냈으니 

단숨에 쓸어, 없던 자리로 되돌려 놓았으니, 그래 엄마!


눈이든 물이든 눈물이든

모래든 돌가루든 뼛가루든


고관절을 잃고 밤낮으로 기저귀에 그리는 

오순이라는 오랜 이름의, 엄마가 그리는




산골에 살다 보면


                                             김월준


산골에 살다 보면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철엔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

솔가지에 눈이 쌓이면

눈 무게에 못 이겨 

이 골짝 저 골짝에서 

청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요란하게 귀청을 때린다

사시사철 푸른 결기 내뿜던 

억센 소나무도

부드러운 눈雪 앞에선 어쩌지를 못한다

사람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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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으로 돈 벌 수 있나요?

                ― 막내손자의 일기 6

                                                                양왕용

   

할아버지

수학으로 돈 벌 수 있나요?

옆에서 잠들다가 갑자기 물어오는

막내 손자

어리둥절해 할 말을 찾지 못하는데

할아버지 

모두들 그러하니까

나도 의사가 돼 돈도 많이 벌고

할아버지 할머니 병도 고쳐주고 싶은데,

그러나 

나는 수학을 잘 하니까

수학으로 돈 벌 수 있다면

더욱 수학 열심히 하고 싶어요.

그래, 네가 어른일 때에는 

수학 잘 하면 

돈 많이 벌고. 사람 고치는 것보다

온 세상을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 

나도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수학 잘 하면 수학자도 되고 

과학자도 되고 기술자도 되어

나라와 지구의 병도 고칠 수 있겠지요?

할아버지

오늘밤 잠 잘 올 것 같아요.

그만 이야기하고 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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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

                         

                                             전원책


오래전부터 그랬다는 듯이 

풀잎들은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먼 발걸음에 미리 흔들렸다, 

그러니 가을이 성급하게 온 것이다,

보라. 누가 천년을 산다면 들을까.

코스모스 지천으로 피던 언덕 풀밭 걸으며

지난 수십 년 물었던 것

지독히도 묻고 묻던 답을 기다렸다. 

당신은 어디를 가고 있는가.

가을이 온다는 소식처럼 그 답이 올 리 없지만 

인과因果를 헤아리는 게 누군들 슬프지 않을까.

그래서 기억의 먼 길 둘러가는 그런 밤엔 다들 운다.

깨어나 누가 노래하지 않아도 

엿듣지 않아도 은밀한 전갈은 백리百里를 간다. 

집들은 방마다 불을 켜

사람들은 온몸으로 기껏 글을 쓸 것이다,

아무도 읽지 않을 역사 같은 것. 

수없이 지운 기억 같은 것.

늘 그렇듯이, 혹은 그저 그런 것.

어디쯤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 상처를 핥아줄 것인가. 

그 한 세월 너머 혹 만나거든 비로소 잊힐

긴 기다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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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무게


                                              김주혜


서재에 쌓인 책을 치울 때가 되면 

한동안 연민에 빠진다

책을 통해 그들과 만나

영혼이 깃든 대화를 할 수 있었으니

차마 내 생전엔 못 버리지 싶다

책상 서랍 속도 어지럽다

정리해야지 하면서 보낸 시간들이 수두룩하다

자잘한 기억들이 말을 걸어온다

불교에선 한 번 스친 인연도 

전생에 오백 번 만난 사이라는데

만나기 싫은 사람을 떨쳐내지 못하듯

만지작거리다 다시 쑤셔 넣는다

시절 인연들도 한꺼번에 쏟아진다

고인이 된 얼굴도 젊고 날씬하게 웃는다

웃는 얼굴은 치울 수가 없다

책과의 만남, 너와 나와의 만남

모두 내 생애의 쇼 타임이니 버릴 수가 없다

그 버려지고 잊혀지는 것이 나 자신이라면?

모두 제자리로 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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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

                     

                             김영재


선암사 대웅전 앞

나무 아래 쉬었다


고개 들어 하늘 보니

나뭇잎 송송 뚫렸다


벌레들

일용할 양식

아낌없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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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사이  

                                  이제우


하찮은 일일수록 

고집 세워 대들다가 


다시는 아니볼 듯 

앵돌아져 곧추 오면


미움은 멀리 못 가고 

가던 발길 돌린다.


다급한 사정에는 

긴말하지 않아도


눈치로 알아듣고 

몸을 던져 돌보지만


가끔은 미운털이 박혀 

전화기도 밀친다.


심기가 뒤틀릴 땐 

혀를 가둬 개기더니


얼결에 마주치자 

득달같이 손을 잡고


대소사 거친 굽이를 

날개 달아 돕는다. 





눈사람


                                            이창건


혼자 바람을 맞고 있는 나무를 보았어

밤 부엉이 울음 따라 부엉부엉 우는 나무를 보았어

봄 오면 나는 녹아 사라지겠지만

저 나무는 잎이 돋고 꽃이 피겠지

나비들도 팔랑팔랑 날아오겠지

혼자 바람을 맞는 나무를 보았어

외로운 겨울을 견디는 나무를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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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버킷리스트

                                      

                           정용화


아름다웠던 시절은

까마득하게 멀어

기억조차 희미하여도


온힘으로

가보아야  할 내 고향 낡은 집


가깝지 않아도

눈을 똑바로 뜨고

한참이라도 날아가련다.


비록

늙으신 부모님을 

뵈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어도


날고 있는 깃털을 적시는 바다 비와

내 마음을 몰라주는 바닷물이 

도움주지 않아도


아직 

반도 못 푼

버킷리스트들을

중요한 순서대로

하나하나 지워나갈 것이다.




아가 Ⅱ 3


                                          신 달 자


그대가 꺾어 준 물 오른 나뭇가지

비취비녀로 머리에 꽂고

타오르는 노을 한 자락 찢어

기명색 치마로 두르면

이 한순간 나는 황진이라

그대에게 밤이슬의 한 잔 술을

권하오니

동짓달의 긴 밤을 풀지는 못했으나

머무소서 오늘 이 밤을

내게 머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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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몸가짐

                                              안 정 옥


단풍잎들이 붉다 그 나무들은 어디에 있건 한결같다 그러나 벚나무 잎은 다르지 한 가지 색이 아닌 몇 가지 빛깔로 멈춘다 같은 벚나무의 잎이라도 색이 다르듯 나무 아래를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싶을 때가 있긴 하다 가장자리는 아직 푸르스름하고 흐린 갈색 한 줄 그 아래는 벼락처럼 붉다 그곳에 발걸음을 옮기기 바로 전에 내려앉은 잎이다


한동안 생각, 내 마음에는 어찌 여물지 못한 탐貪함이 많은가 나무처럼 제 몸을 버리는 여유조차, 내가 쓰던 펜에다 붉은 벚나무 잎, 내 발걸음을 막아선 잎을 잠깐 빌려 깃털처럼 붙인다 이제 벚나무 잎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펜을 만들어야 할 근거가 있다


이별할 때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 이별은 늘 나보다 한발 앞서 온다 처음 사랑이 나를 보낼 때를 시작으로 도미노처럼 틈틈이 찾아온 이별은 많아졌다 만나거나 헤어질 때의 몸가짐 없이


미루고 피하기만 했던 그와의 이별에 대한 답례를 이제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내 손가락이면 충분할, 물론 내 몫을 보태야 할 것이다 벚나무의 붉은 잎이 나를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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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일


                                             정 재 영


텃밭 풀

줄기만 뜯었더니


한 삼 일 후

다시 무성해졌다.


뿌리째 뽑을 수 없다

무슨 심지가 그리 질길까


남 말 말아야지

내 그리움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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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시늉


                                     이 지 희



팽창하지 않는 오후 2시에요.

계절의 창문들이 한낮의 골목을 단단하게 조여요

연거푸 꿀렁거리지 않아도 되는 목젖을 보고 있어요

카페라떼 한 잔은 초면인 사람들에게 꼭 적당한 양

침묵하다 던지는 한두 마디가 입가 거품으로 얼비쳐

하루는 한 모금씩 괜찮아져요

오늘 안 것은 내일 몰랐고

어제 알 일은 오늘 모르고 있어요

까무룩 떠나간 인연의 목 넘김이 부드러워졌어요

느슨히 엉킨 사람들, 볕살조차 함부로 흔들리지 않아요

몸피 불리지 않은 대낮은 어디서부터 흩어질까요

흉내 못 내는 오후가 그저 오후라 불리고 있어요

창문 옆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요

방금 삼킨 한 모금의 시늉으로 날 알았나 봐요

창문 한 칸의 간격이 충분해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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