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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SYKOO Aug 25. 2020

게토 얼라이브의 정지선 디렉터를 만나다 1

살아 숨 쉬는 나만의 음악적 게토 ghetto를 찾아서, 정지선 디렉터



[아치쿠가 만난 아트&피플]은 미술 작가, 배우, 영화감독, 음악감독, 프로그램 개발자, 스타트업 CEO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보는 아치쿠의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아트디렉터 아치쿠가 만난 아트&피플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또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와 각자의 시선에서 본 '미술'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며 각자의 삶에서 '미술'이 혹은 '예술'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탐구합니다. art director, ARTSYKOO












살아 숨 쉬는,

나만의 음악적 '게토 ghetto'를 찾아서


성수동 음악 대안공간 게토 얼라이브 Ghetto Alive의 [정지선 디렉터] 만나다.


Part I







게토 얼라이브 정지선 디렉터





안녕하세요, 아트디렉터 아치쿠 입니다. :)


이번 아치쿠가 만난 아트 & 피플에서는 성수동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음악 중심의 대안공간, [게토 얼라이브 Ghetto Alive]의 정지선 디렉터님을 만나보았죠. :)



정지선 디렉터 @게토 얼라이브 Ghetto Alive (성동구 왕십리로 104)







게토 얼라이브(www.ghettoalive.com)는 2016년 처음 개관해서 지금까지 한국 최고의 재즈 뮤지션 & 얼터니티브 사운드 뮤직을 소개하는 중추적인 아트 플랫폼으로 자리 잡아, 지난해 말에는 월간 재즈에서 주목해야 할 재즈 사운드 공간으로 소개되기도 했죠.



게토 얼라이브(www.ghettoalive.com)





피아니스트 다움(Da:um) 트리오 공연(2020.2) @게토 얼라이브


Beauty of Unity, 계수정(piano), 김소민(민속 타악기) (2017.12) @게토 얼라이브





서울숲 근처, 지하 1층 공간에 있는 게토 얼라이브는 본디 오래전 곰탕을 팔던 음식점이었던 곳으로 음식점이 폐업한 뒤 20년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해요. 


그렇게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공간을 음악으로 깨운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정지선 디렉터 님이었는데요,


방치되었던 지하 공간은 과거 성수동 근로자들의 허기를 채워주던 공간에서 정지선 디렉터의 손길과 뮤지션들의사운드로 채워져 이제는 성수동을 찾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soul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그 결과 바로 오늘날의 게토 얼라이브라는 음악공간으로 탄생될 수 있었죠. :)







아치쿠와 정지선 디렉터님과의 우정은 지난해 2019년 초, 아치쿠가 게토 얼라이브의 공연을 보러 가면서 시작되었는데요, 당시 아치쿠는 아치쿠의 소중한 친구 박정연 님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프로그램 기획자) 님의 초대로,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주요 연주자들의 공연을 보러 가면서 게토 얼라이브라는 멋진, 실험적인 사운드 스페이스에 처음 방문하게 되었어요. :)






(left) 게토 얼라이브의 정지선 디렉터님(좌)과 아치쿠(우)  @유니온 아트페어 2019. 9.

(right) 게토 얼라이브의 정지선 디렉터님(좌)과 아치쿠(우)  @ 위워크 역삼 2020. 8.




정지선 디렉터님은 공연을 기획하는 기획자 이자 스스로도 뮤지션으로서도 훌륭한 커리어를 쌓으셨을 뿐만 아니라, 본인 만의 특별한 매력을 지닌 분인데요, 더불어 아치쿠와 여러모로 잘 통하는 좋은 친구이자 선배님이시죠.


(때때로 아치쿠가 “과연 이 길로 가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타이밍에 언제나  단호하게 “아치쿠가 맞는 거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주 잘 가고 있다!”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시는 정지선 디렉터님은 언제나 아치쿠에게 소중한 친구이자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어주시는 인생 선배님이세요! :)










 “게토 Ghetto”라는 단어는 본디 16세기 무렵 이탈리아에서 유대인들을 격리해 모여 살게 했던 구역을 의미했던 것에서 시작되었어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ghetto라는 단어는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닌,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 그 의미는 이제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는 소수자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어찌 보면 게토 얼라이브의 정지선 디렉터님께서도 뮤지션 각각의 자유로운 음악적 자유로운 소울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 그리하여 소수 minority의 사운드와 메시지에도 귀를 기울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해방감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이 있는 곳이라는 컨셉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 게토라는 공간과 디렉터님이 추구하는 예술적 지향점이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토 얼라이브 공연 실황 이미지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정지선 디렉터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던 아치쿠는 이렇게 멋지게 살아오신 분께 사랑받고 응원받을 수 있는 저라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고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



도화지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예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면서 성장해 온 게토 얼라이브의 정지선 디렉터님의 음악 이야기와 그녀만의 게토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으시겠어요?



Shake Your Artsy Spirit!

art director, ARTSYKOO





















게토 얼라이브 정지선 디렉터


  





ARTSYKOO. 정지선 디렉터님은 본디 성악을 전공하셨어요. 성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고, 또 뮤지션으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20대 초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너도 너 같은 딸 낳아서 길러봐!”


‘[정지선]이라는 사람의 20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있다면 아마도 저희 엄마의 이 말씀이 아닐까요. (하하)


이 말은 당시의 저를,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 시절 제 모습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하던 치기 어린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고등학교 2학년 말에 학교 음악 선생님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성악을 전공하기 시작했어요. 그전까지 교회에서 성가대와 여고 합창반 활동을 꾸준히 해왔죠. 열심히 입시를 준비해서 성신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에 진학했어요. 


하지만 학교에 적응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죠. 여대 특유의 분위기, 특히 당시까지만 해도 교내 학번 간의 서열주의도 강했던 경향이 있어서 학교생활에 큰 흥미로 못 느꼈어요. (당시 저는 ‘가수’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고 언젠가는 저의 목소리로 가득 한 정식 앨범도 내서 ‘정지선’이라는 사람만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공무원 집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성악 레슨 받으러 다니던 입시생 소녀는 음대 성악과 진학 이후, 그 모습도, 생각도, 행동도, 판단도, 집안 어른들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언제나 놀라움과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줬던 히피 혹은 보보스 같은 자유롭고 당찬 여대생으로 완전 트랜스포밍 했더랬죠.  :)



그 당시 제가 마주하던 1990년대의 세상은 아직 어리고 아티스틱하고 패기 넘치는 저에게, 고리타분한 룰이 천지였던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세상은 세상대로 저를 결코 평범하지 않은, 어디로 튈지 모를 에너지로, 종잡을 수 없는 어린 아가씨로 보았을 것이라 생각해요. (정말 길을 걷다 보면 저의 튀는 패션이며, 헤어 스타일, 자유로운 애티튜드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돌아볼, 그런 20대를 보냈었죠.)


최근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이 90년대 젊은이들의 이야기와 대중문화를 코드로 하는 TV 드라마, 혹은 90년대 압구정 오렌지족, 야타족에 대한 뉴스 보도 같은 영상들이 인기가 있어요. 그 시절을 살았던 제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저를 포함한 당시 20대들은 자유롭고, 거침없이 ‘오늘. 오늘,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자유와 도시의 불빛과 사운드를 찾아다니며 다시 오지 않을 우리들의 찬란한 젊음을, 그 열기를 끝없이 뿜어대는 그런 날들이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지 않았나 싶네요.


 
 

스물아홉 무렵 뮤지컬 무대에서 공연 중인 게토 얼라이브 정지선 디렉터의 모습








ARTSYKOO. 정지선 디렉터님께서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대중음악계를 곳곳을 가수, 음악감독, 가수 데뷔를 준비하는 연습생 등 다양한 활동을 하시며 왕성한 활동을 하셨다고  전해 들었어요. 당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음악 활동을 하셨고, 또 그 경험을 통해서 어떤 것들을 배울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뒤늦게 사춘기(혹은 중2병)가 찾아온 저에게 대중문화, 혹은 대중음악 산업계의 입문은 짜릿한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은, 저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세상이었죠.


20대 초, 저는 음대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당시 학교 생활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방황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신촌, 홍대, 강남 일대를 오가며  90년대 문화예술의 중심에 있었던 X세대의 최신 컬처 코드를 오롯이 경험으로서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대중문화 산업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죠. :)



당시 연세대학교 작곡과에는 방송국과 대중음악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던 지인들이 꽤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작곡가이자 당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셨던 안지홍 작곡가님의 어시스턴트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공학 박사 출신의 공학도출신이자 제3, 4 공화국(각각 1993, 1995, MBC)과 배우 심은하 씨가 열연한 전설적인 MBC 드라마 ‘M(1994, MBC)’, ‘청춘의 덫(1999, SBS)’ 등 화제의 드라마 OST 음악감독직을 맡으셨던 안지홍 작곡가 님을 통해 많은 경험과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방송국에 오픈릴 테이프 open reel tape, 또는 CD 전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 이 과정을 통해 방송국에 자주 출입하면서 방송국과 그곳의 PD, FD, 연출분들과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느샌가 저 또한 방송국에서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영상 미디어의 음악을 선별하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저는 아직 대학 졸업도 하지 않았던 20대 중반, ‘방송국’이라는 대중문화의 산 보고나 마찬가지인 엄청난, 모두가 선망하는 환경에서 20대 중반의 여성 음악 디렉터로 활동을 하는,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난 기회를 얻게 된 거죠. (제가 지난 1995년부터 1998년까지 감수 및 감독, 참여했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오퍼레이팅 데뷔 작 드라마 ‘홍길동(1998, SBS)' & ‘청춘의 덫(1999, SBS) 그리고 ‘베스트극장(MBC)’ 등이 있어요. )




게토 얼라이브 정지선 디렉터

‘음악감독’이란 주어진 작품의 전반적인 흐름과 음악이 필요한 극적인 상황 속 극 중 인물의 ‘감정’ 혹은 ‘상황’을 시청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음악을 세심하게 선별하는 직업이에요. 따라서 드라마, CF 등 대중 매체 영상 콘텐츠의 형태와 그 콘셉트에 적합한 음악을 선별하기 위해서는 감독 자신만의 감성과 폭넓은 음악적 지식을 터득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음악을 직접 찾아 들어서 들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처럼 디지털 음원 시장이 열리기 이전인, CD 매체로 음반을 직접 구매해서 들었던 90년대였기에, 저는 매일같이 대형 레코드사(신나라 레코드, 타워 레코드)에 가서 음반을 체크하며 제가 맡은 드라마, CF와 같은 방송영상 콘텐츠의 콘셉트에 어울릴만한 음악들을 고르면서 정말이지 수천 장의 CD 앨범을 접할 수 있었죠. (특히 CD는 진공포장이 되어 있어 앨범을 구입해서 들어 보기 전까지는 그 가수에 대한 정보와 앨범 커버 디자인 콘셉트만으로 안에 수록된 음악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어요. 게다가 음반 구매에 살 수 있는 돈의 제약도 컸죠.)




이런 제한된 조건에서 실패를 최소화하여 아직 들어보지 못한 새 앨범을 안전하게 구매하기 위해서는 제가 생각하는 콘셉트의 음악 작업을 하는 뮤지션에 대한 사전 스터디, 미국 팝 시장(빌보드 차트)에 대한 인사이트가 있어야 해서 정말 많은 공부를 해야 했죠. 덕분에 이 당시 습득한 대중음악을 포함한 팝 음악, 제3세계 음악에 걸쳐 폭넓은 음악적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향후 이어갔던 그 모든 음악 활동 그리고  ‘게토 얼라이브(Ghetto Alive)’라는 음악 중심의 대안공간을 운영하는 공연장 디렉터이자 음악감독 맡은 지금까지도 제 인생의 강력한 음악적 파운데이션 과정이 되어준 정말 소중한 경험이 되었어요. :)





저는 음악감독 활동을 하면서 가수 데뷔를 준비하는 연습생 생활을 하기도 했어요. (현재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BTS의 아버지 방시혁 대표와 함께  연습생 생활을 했죠.:) 당시 CJ 엔터테인먼트에서 미국의 여성 3인조 팝 뮤지션 TLC와 같은 음악을 지향하는 그룹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아쉽게도 데뷔는 무산되었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방송계’라는 곳의 경험을 어린 나이에 하게 되고, 그쪽 인맥도 두루두루 쌓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학교나 친구, 가족 등 주변의 동경을 한 몸에 받기도 했죠. 한 번은 한 드라마의 엔딩 크레디트에서 제 이름을 발견한 친척분들이 “진짜 지선이 네가 한 거냐” 며 전화 세례를 받기도 했어요.  


가수 지망생으로 활동하며 하루하루 대중음악 산업의  다양한 포지션을 오가며 어린 나이에 제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당시 내로라하는 방송국 유명 PD, 연출님 등의 방송국 인맥과 가수, 작곡가 등 대중음악계의 인물들과 어울려 지내던 그 당시의 제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20대라는 나이의 제 삶은 정말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이 느껴질 정도예요.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그전엔 감히 생각도 못했을 스케일의 일들을 주도적으로 실행하고, 열심히 헤쳐나가면서 대중문화의 중심에서 하루하루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


 
 








ARTSYKOO. 정지선 디렉터님께서는 드라마 주제가, 그리고 광고 배경음악에 보컬로써 여러 차례 참여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치쿠가 놀랐던 사실 무엇보다도 90년대 탄생한 수많은 센세이셔널 했던 광고 중에서도 배우 김민희 원빈 김효진 배우가 출연, 그리고 그 유명했던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라는 노래를 부르신 분이 바로 정지선 디렉터님이라니…!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어요!!! :)



018 PCS CF 1편 -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원빈, 김민희, 김효진 출연, 1999년)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네. 그 노래를 불렀던 가수가 바로 저랍니다. (하하하)

당시 사실 그 광고와 그 광고 음악이 그렇게까지 크게 인기를 얻을 줄은 몰랐어요. 저는 드라마, 특히 광고 음악을 중심으로 음악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가수였고, 그렇게 활동했던 여러 작품 중 하나가 바로 그 전설적인 CF 음악이 되었던 거죠. (아쉽게도 당시 광고계에서는 광고보다 광고 음악이 더 유명해져서 진짜 상품에 대한 각인이 덜 되었다는 평을 받으면서 이 광고에 대한 평판은 엇갈리는 해프닝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추후의 일을 떠나 그 광고를 통해 저는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떤 대중의 힘(해당 광고와 유명 CM송을 불렀던 저에 대한 신문 기사도 났을 만큼 반응이 뜨거웠었죠.), 그리고 그 힘이 한 사람의 존재를 이렇게 만큼이나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놓을 수 있다는 엄청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









게토 얼라이브 정지선 디렉터




ARTSYKOO. 그렇게 정지선 디렉터님께서 방송계 그리고 대중음악계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시던 20대 시절, 당시 대중음악계에서 활발하게 뮤지션으로 활동했던 분들은 지금 우리가 말만 하면 다 알 아이돌 가수들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특히 디렉터님께서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하셨던 당시에 교류했었던 분 중에는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방시혁 대표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정말 실로 엄청난 인연이 아닐 수가 없는데요, :) 당시의 정지선 디렉터님의 일상 모습을 상상하면 정말이지 약 20년 후인 오늘은 까마득한 먼 미래였을 거라 생각돼요. :)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방송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음악계에 종사하면서 90년대 대부분 방송국과 대중음악 관계자분들, 특히 당시 유명 가수와 작곡가들과의 교류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환경 속에서 매일매일을 살았죠. 방송국, 스튜디오, 연습실을 오가며 음악 하는 친구들과 일도 하고 함께 어울려 놀기도 하면서 음악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았죠. 또 그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작업을 맡게 되던 그런 날들이 이어졌어요.


그렇게 대중음악계를 가로지르며 이곳저곳을 오가며 음악적으로 교감하고 또한 업무적으로 밀접하게 교류했던 디렉터적인 음악계 인물로는 작곡가 겸 프로듀서, 그리고 BTS의 아버지인 방시혁 대표가 있었어요. 제 개인적인 이분에 대한 경험과 인상을 생각할 때 현재 이 두 분이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뮤지션들을 육성하고, 앨범의 곡 작업을 하며,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주옥같은 명곡, 유행 음악을 지속해서 만들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정말 수험생(혹은 수도승)처럼 공부에 미친 고3처럼, 혹은 신에게 귀의한 수도승처럼 오로지 음악 작업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이었다는 거예요.


90년대 당시 대중음악 산업계의 전반적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거의 그 모든 업무, 네트워킹,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앨범과 가수 홍보라는 매니지먼트 일은 기본적으로 술, 그리고 담배로 시작해서 끝이 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어요. 실제로 그렇게 방송계와 제작사 간의 밀접한 협업이 진행되었던 음반의 흥망이 여기에 달렸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당시 대중음악계 분위기에서 술도 담배도 일절 하지 않고 심지어 공부도 잘해서 소위 말하는 sky 대학 출신의 작곡가이자 저와 함께 CJ엔터테인먼트에서 가수를 준비 중이던 방시혁 대표는 대중음악계에서 아마 정말 드문 사례였죠. 무엇보다도 특히 방시혁 대표는 방송국의 여러 좋지 않은 관습에 타협하지 않고, 정도와 자신의 철학을 지키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죠.



제가 함께 그 시절을 보낸 분이 지금 이렇게까지 거대한, 세계적 거물급 인사가 된 현재는 사실 어찌 보면 그분들이 걸어온 길, 살아온 방식을 생각할 때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렇게 정도를 지키면서 자기 일에 몰입해서 하루하루 성장하고 약속을 지키는 분 옆에서 생활했던 저였기에 어린 나이의 여성이라는 조건에서 대중음악 산업계에서 상대적으로 별 탈없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이라고 믿어요.
 








게토 얼라이브 정지선 디렉터









ARTSYKOO. 사실 아치쿠도 어린 시절 대중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수들의 무대 오케스트라 세션으로 활동하면서 일찍이 방송계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요, 모두들 ‘방송사고를 내면 안 된다’라는 방송계의 기초적인 룰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두가 언제나 초 긴장 상태가 될 수밖에 없고, 방송 제작 환경이 워낙 열악했던 역사가 길었기에 (물론 현재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제작진들의 신경은 언제나 수면부족과 완벽주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날이 선 심리적 상황일 때가 많아 보였어요. 따라서 이런 환경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정말 ‘번아웃 burnout’ 증후군이 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맞아요. 방송국에서 오래 버틴다는 정말 많은 것을 의미해요. 어느 날 저는 점점 모든 신경이 예민해지고, 그러면서 신경이 쇠약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이뤄낸 그 어떤 성취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크고 완벽한 무언가를,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그 무언가를 갈망했죠. 음악에 파묻혀 음악만 꿈꾸면서 살았던 음대생은 슬프게도 이제 음악이, 혹은 그 어떤 사운드를 듣는 것 자체가 괴롭고 역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어요. 여느 때처럼 생방으로 진행되는 한 프로그램에서 음악감독을 맡아서 하고 있는데, 의사소통의 문제로 인해 한 프로그램 책임자로부터 들어서는 안될 말을 듣게 되었어요. 고성으로 쏟아붓는 거친 말들을 듣고 있자니 그저 정신이 멍 해지면서 불현듯 “아, 내가 여기서 정말 무엇을 위해서 이런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가”, “나는 내 음악을 하고 싶다. 단지 그것밖에 내가 지금 현재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없어.”라는 것이더군요. 저항하거나 항의하기에는 저의 힘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고, 차후에 아예 제 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루하루를 그런 환경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바빠서 모르는 척하면서 살아왔더니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둑이 터지듯 그렇게 ‘뚜둑-’하는 소리와 함께 붕괴되어 버린 거죠.





그렇게 저는 수년간 드라마와 CF를 열정적으로 종횡무진하던 벗어나 ‘진짜 나의 음악을 하기 위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학로 연극판으로 떠났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이전의 화려한 하루하루와는 전혀 다른 삶을,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연습실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 연습을 하는 새 삶을 시작했어요. 또한 당시 새롭게 주목받고 있었던 “모던락 Modern Rock”이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로 뛰어들었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방송국을 뒤로한 채 떠나온 일터에서 저는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며 재미를 느끼는 그런 삶’을 알려준 제 인생의 반쪽, 남편을 만나게 되었죠. :)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이전에 몰랐던 행복을 알아가는 경험은 정말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과도 같았던 방송계, 대중음악계라는 빙판에서 수년간 어린, 여성, 음악감독이라는 조건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은 정말 피를 말리는 경쟁과 스트레스 속에서 홀로 오롯이 견뎌내야 했기에 많이 외로웠던 것 같아요. 그렇게 너무 빨리, 그것도 대중문화계, 방송국이라는 극한의 사회생활을 하면서 20살에 누려야 했을 소소한 일상과 행복을 남편을 만나면서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보상받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편과의 만남은 소박하지만 아름다웠고, 안정감이 주는 행복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답니다. :)


게토 얼라이브에서 공연 중인 정지선 디렉터


미국에서 오랜 시간 공부했던 남편은 제가 이때까지 서울에서 만났던 전형적인 ‘유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어요. 소박하고 순박하고 세상의 때가 타지 않은 그런 하얀 도화지와도 같은 사람이었죠. 남편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줄 게 있다며 커다란 박스를 하나 주더군요. 그 안에는 바로 오토바이 헬멧이 들어있었어요. 내심 뭔가 엄청 화려하고 엄청난 무언가를 기대했던 저는 너무나도 의외의 선물에 당황하기도, 그리고 그런 남편의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씨가 너무 예뻐 보이고 감동적으로 다가왔어요.



남편과의 만남을 통해 하루하루 새로운 즐거움을 함께 찾아갔던 것 같아요. 둘이서 홍대에서 스쿠터를 타고 둘이서 나란히 헬멧을 나눠 쓰고 홍대에서 용인까지 그 먼 거리를 오가는 그런 낭만적인 데이트가 있던 나날이 이어지면서 그렇게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죠. 디바 Diva이자 음악감독이었던 정지선은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저의 세 아들들 (혈기왕성한, 그리고 세 아들 모두 착하고 또 멋진 축구 선수입니다!)의 엄마가 되었지요. 그리고 아내로, 엄마로 열심히 살다 다시 꿈을 펼쳐 가정을 한쪽에 그리고 게토 얼라이브라는 아티스트와 뮤지션들의 게토가 되어주고, 저 자신의 게토가 돼서 세상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실험적인 도전을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또 다른 한쪽에 두고 두 개의 제 행복을 그려왔고, 그려가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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