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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Sep 04. 2020

패키지 여행의 잔인함

- 내가 보게 된 것

잔인한 것들의 순위를 매겨야 한다면, 나는 패키지여행이 상위권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쪽이야.


너 에버랜드 가봤니? 친구나 애인이랑 가봤을 텐데. 나는 거기에 일하러도 가봤다? 스무 살 때였는데,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하다가 무슨 여행사에 가이드 보조 같은 걸 하게 된 거야. 태국인들 대상으로 하는 5박6일 패키지여행 상품을 따라다니는 게 내 일이었어. 아침에 공항으로 가서 깃발을 흔들고, 여행객들 버스까지 인솔하는 걸 시작으로 하루 종일 버스타고, 내리고, 사진 찍어주고, 밥 날라주고. 뭐 그런 잡다한 일 하는 거였지.


가이드 아저씨는 사진을 팔아서 돈을 버는 사람이었는데, 정말 쉬지 않고 한 명 한 명 50장이 넘는 사진을 찍어서 마지막 날 인쇄해서 파셨어. 그때가 이미 2010년이라 다들 사진기나 핸드폰도 있을 때였거든. 그래서 사진을 판다는 게 처음에는 이해가 안됐어. 다들 자기 사진기로 열심히 찍는데 그게 팔리겠어? 했던 거지. 알고 보니 다 전략이 있더라. 비결은 ‘미안하게’ 만드는 거였어. 밥 먹을 때 밥도 직접 날라주고, 소스도 눈앞에서 뿌려주고. 삼계탕 같은 것은 일부러 뚝배기와 닭을 분리해서 담았다가 눈앞에서 옮겨 담아준다구. 엄청 의미 없잖아. 뚝배기째 끓인 음식을 다시 뺐다가 눈앞에서 담아준다는 게. 그래도 그냥 그렇게 하는 거야. 사진이 팔린다니까.


그래도 재밌었어. 파주 프로방스 마을, 경복궁, 남이섬, 청와대. 일하면서 돌아다니니까 구경도 되고 좋았지. 사실 그때까지는 별로 가보지도 못했던 곳들이었거든. 남이섬 배타고 들어갈 때는 마냥 좋아가지고 가이드 아저씨 몰래 친구들하고 통화도 하고, 사진 찍는 척 하면서 혼자 걸어다니기도 하고 그랬어. 그날 기분 좋게 일을 끝내고, 이태원에 있는 호텔로 돌아와서 태국 손님들 모두 체크인 시키니까 밤 열두시쯤 됐거든. 아저씨가 집까지 차로 태워다주셨어. 다음날은 에버랜드 가는 코스였는데, ‘놀이기구도 몇 개 태워주려나?’ 내심 기대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나네.


다음날 버스는 에버랜드까지 신나게 달렸어. 사실 버스는 그냥 달린 거고, 내가 신났던 거지. 에버랜드 매표소까지 들어가는 구불길에서 가이드 아저씨는 뭐라뭐라 설명을 하는데, 나는 태국말 모르니까 별로 신경도 안 썼어. 아무튼 매표소까지 버스는 잘 도착했다 이말이야. 근데 청천벽력같은 소식. 아저씨가 나는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거야. 자기가 사진 찍는 스팟이 있고, 거기서 사진을 몰아 찍을 거라서 내가 필요가 없대. 나는 어쩌고 있냐고 물었더니. 버스에서 잠이나 자면서 쉬라고 하시네? 풀이 죽어서 알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렇게 버스에 남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어. 패키지여행이 잔인하다고 했지? 그 상품값에 에버랜드 티켓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 패키지여행이라는 게 그렇잖아. 엄청 싼 것처럼 홍보해놓고, 쇼핑몰만 들입다 돈다거나, 액티비티같은 걸 강매하듯 하는 거. 우리 알면서도 속아주잖아. 지금이야 알지만 나는 그때 그런 거 전혀 몰랐거든. 태국 사람들은 우루루 에버랜드 안으로 들어가고, 두 가족만 나랑 같이 남았어. 7명 정도. 그때가 오전 10시쯤 되었고, 오후 세시는 돼야 나온다는데. 그 시간이 어찌나 막막하던지. 시간이 뒤로 가는 것 같더라. 그때 처음 알았는데, 매표소에서 바라보는 에버랜드는 그야말로 동화 속 세상 같더라고. 정말 예쁘더라. 입구에서 사람들은 끝도 없이 웃으면서 들어가고. 멀찍이서 롤러코스터 탄 사람들의 익살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은은하게 퍼지는 음악들이 정말 사람 설레게 하대.


넓게 펼쳐진 매표소와 게이트를 앞에 두고, 나는 조금 서성이다 버스로 돌아왔어. 기사님은 낮잠을 주무셨고, 나도 맨 앞좌석에서 의자를 잔뜩 젖히고 음악을 듣기로 했지. 널찍한 버스 앞창문으로 평일 낮 한가로운 에버랜드 입구가 시원하게 보였어. 그리고 다음으로 보였던 건 그 앞을 서성이는 태국 가족들. 딸의 손을 잡고 그 앞을 걸어 다니는 태국 아빠의 모습이었어. 상상할 수 있겠어? 애들은 벌써 철이 들었는지 에버랜드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아빠는 민망한 표정과 미안한 마음으로 애들하고 그 앞을 왔다갔다 하는 거야. 삼십분도 아니고 한 시간 두 시간동안, 사람들이 놀이기구를 타러 들어가는 그 매표소 앞에서 그 태국 가족들은 천천히 걸어 다녔어. 나는 그 장면을 보기가 힘겨웠어.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사귀던 여자친구와 에버랜드를 갔을 때. 나는 다시 보고야 말았어. 또 다른 태국 가족을. 빈 버스 앞을 서성거리며 에버랜드 매표소 너머를 상상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나는 깨달았지. 내가 돈이 없어 에버랜드에 들어가지 못하는 가족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거. 그걸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 한 번 그런 사람이 되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는 거. 시력을 가진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살지는 않는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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