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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Nov 22. 2020

영화롭게 말걸기

너와 나의 호우시절

불가용어에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뜻이다.

흐드러지는 경향이 있기야 하지만 허진호 감독의 영화들을 상당히 좋아한다. 이를 테면 영화 '호우시절'과 같은. 예전엔 정우성이란 배우에게 내내 외모로든 연기로든 그닥 감흥이 없었는데 영화 '호우시절' 덕분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호우시절' 이라는 영화 제목은 두보의 시에서 가져온 구절로 '때마침 알맞게 내리는 비'를 일컫는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라고 시작하는 이상은의 노래를  영화 '호우시절'을 보다  떠올렸다. '우리 그때'가 사랑이었음을 왜 '그때 우리'는 알지 못했을까. 세월이 흘러 운명은 둘을 다시 마주하게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그때는 다만 '시절인연'이었을 뿐이다. 때마침 내리는 비는 '다시 사랑'이 아닌 사랑이 지나갔음을 잔잔히 인정하게 한다.

추억이 아름다운 건 추억의 시제가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내준 자전거를 타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의 영속성이나 항상성을 덥썩 믿을 만큼 더이상 순진하진 않지만, 시절인연이 건네주는 추억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연륜은 쌓였다. 그러므로 이별이 남기고 간 슬픔의 총량은 여전할지 모르지만 슬픔을 감지하는 상미기간은 점점 짧아져가고 그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우리의 호우시절은 끝났지만 추억은 남아 지금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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