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받아 간 자리였지만 초대해준 인물과 친한 사이는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웅성거림 같은 게 그리웠고 오랫만에 썩 괜찮은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어 초대에 응했다.
예상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나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는 그에 안도했다. 테이블 가장 자리에 지박령처럼 붙어 딱딱한 치즈를 씹으며 레드 와인을 홀짝였다. 와인은 세련되진 않았어도 딜라이트 했다. 마치 오늘 이 모임 같다, 고. 기억에 머무르기보단 순간에 정직한 그런.
테이블에 남은 사람은 나 하나, 하얀 테이블보 위에 글라스를 투과한 빛이 칠해놓은 분홍색 그림자의 흔들림을 관찰했다. 아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게 맞겠다.
그가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얼마만이지? 몇주? 몇달? 그와는 요사이 서먹하게 지내는 중이다. 서먹과 섭섭의 초성이 같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친밀하던 이에게 섭섭함을 느끼면 서먹해진다. 엄청난 발견은 아니라도 쓸쓸한 발견인 건 확실했다.
서로 말이 없다. 상대를 바라보는 일도 없다. 잔을 들어 와인을 마셨다. 시음 적기를 넘긴 와인, 우리 같네. 하지만 테이블 위에 어린 그림자는 여전히 색이 곱다. 글라스에 와인이 담겨 있어 가능한 현상이었다. 엄청난 발견은 아니라도 반가운 발견이다.
느리게 그림자 각도가 바뀌면서 그가 머리를 뒤로 젖혀 내 어깨에 기대 무게를 싣는다. 셔츠의 빳빳한 질감과 익숙한 향수 냄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진 않았다. 그는 아마 옅게 웃고 있을 것이다. 그냥 안다. 그런 걸 그냥 아는 사이. 화해가 그림자가 기울어지듯 가만히 다가오고, 그때 언어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한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나는 조금만 더 그대로 있기로 한다. 그는 방전된 기계처럼 고요하다. 그림자는 무채색이 되었다. 누군가 글라스에 와인을 채워 주면 좋을텐데. 그러고 보니 와인잔은 모래시계를 닮았구나. 윗칸의 모래가 아래로 죄다 떨어지면 허무함이 대신 자리하는 것도.
달이 뜬 밤일까. 아무려나. 테이블 위의 그림자는 다시 분홍이 되었다. 아직은 괜찮다. 그것이 뭐가 되었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