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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Aug 31. 2022

레비나의 짦은소설

순대국과 열쇠

후암시장을 가로질러 한참을 걷다 어느 막다른 골목 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4층 왼쪽 문을 열면 K의 집이었다.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도 생활이 가능하구나, 그 집의 첫인상은 그랬다. 싱크대는 있었지만 물컵 하나 없었고, 거실엔 대형 캣타워와 나무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고양이가 한마리 있었어. 하지만 저거만 남았네.


K는 종종 그 공간에서 내게 시인지 뭔지 모를 문장들을 낭독해 주었다. 미치도록 그 단어들이 좋아, 이건 누구 시야? 라고 물어도 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구글 검색창에 아직 기억에 남아있는 몇몇 문장을 입력해 찾으려 해봤으나 출처나 작가 이름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그 문장을 기록해두지 않은 건 중대한 실수였다. 어디에도 없는, K만의 것이었으니까.


K와 나는 순대국을 좋아했다. 실은 K덕분에 순대국을 먹게 되었다. 아티초크를 얹은 유기농 샐러드 같은 것만 먹게 생긴 그의 최애 음식이 순대국 이라니. 하지만 K가 데리고 간 순대국 집은 상상 이상으로 맛있었고 충격적으로 더러웠다. 그래도 배탈이 난 적이 없는 걸 보면 순대국 집이란 얼마만큼은 그런 곳일지도.


순대국을 시키면 파란 풋고추가 두개 나오는데 한 번은 K를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먹었다가 재채기에 기침에 콧물까지 흘리며 울었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 조금도 웃지 않았다. 살며시 냅킨을 건네주고 식당 아주머니에게 얼음을 부탁해 물수건에 담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좀 이상한 남자였다. 나는 그가 계속 이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게만 이상했음 좋겠다고.


이제 순대국 그만 얻어 먹으려고.


단언컨대 그보다 완벽한 마지막 대사는 없을 걸. 한그릇에 8천원짜리-특은 9천원이고 우린 늘 보통으로만 주문했다-순대국 정도는 얼마든지 내가 사도 되는데. 구글에 검색 해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문장을 내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 집에 물컵과 책상을 놓아주고 싶었는데. 그는 그 문장을 끝으로 내게 작별을 고했다.


C모양이 좌우로 엇갈린 마크로 유명한 내 양가죽 지갑 동전칸 안에는 K의 후암동 4층집 열쇠가 있다. 열쇠를 핑계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그냥 버리라고 하면 어떻하지? 무작정 가서 문을 왈칵 열어 버릴까? K의 집에 어느덧 새 고양이가 살고, 다른 여자에게 근사한 문장들을 들려주는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K가 물수건에 얼음을 담아 가져다 준다면 좋을텐데. 그럼 나는 너와 순대국을 먹으러 갈텐데. 풋고추는 두개 다 네게 줄텐데. 너의 문장들을 기록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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