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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달래 Jun 09. 2020

고비사막에 묻혀 있을 나의 꼬리를 추모하며.


 우리 집 송순이는 꼬리가 참 풍성하다. 산책을 할 때 꼿꼿하게 서있는 하얀 꼬리는 아빠의 자부심이고 자랑거리다. 좋아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송순이의 꼬리를 생각한다. 송순이의 꼬리를 곱게 묻어준다면 다음 생에서 송순이는 참 어여쁜 인간으로 환생하지 않을까. 그리고 동시에 나에게 있었을 꼬리를 생각한다. 나의 꼬리도 송순이의 꼬리처럼 곧고 힘차고 용맹스러웠을까.


 인간의 생은 너무 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생에 비해 젊음은 또 너무 짧지 않은가. 나는 죽음이 두렵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은 날 공포에 떨게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 떠오른다. 너무 작은 것들까지 사랑하지 말라고, 네가 사랑한 그 많은 것들이 언젠가 모두 날 울게 만든다고 했던가. 인간은 참 어리석게도 사랑하기 전까지는 그것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 작다고 생각해서 조금의 애정을 담기 시작하면 그것은 금세 그 크기가 터질만큼 부푼다. 나의 어리석음은 특히 유별나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사랑해버렸다.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둘 먼저 떠나보내고 아파하고 또 사랑을 하고 떠나가고 아파하고. 그렇게 이어지는 생은 정말이지 너무 아프지 않냐고, 답해줄 이 없는 물음을 허공에 보낸다.


 떠나가는 이들을 보내주는게 익숙해진 할머니는 죽음에 면역력이 생겼다. 옛날부터 마을을 이루고 수십년을 가족처럼 함께한 할머니의 이웃 집들이 텅텅 비었다. 할머니는 종종 농담처럼 이제 곧 나만 남겠다는 말을 하신다. 그 말이 마냥 농담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 할머니의 말에 묻어있는 씁쓸함은 면역력 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변종하듯 죽음의 고통은 익숙해질만 하면 그 모양과 크기를 바꾸어 공격하곤 하니까.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개였던 나는 행복했을까. 지치는 줄도 모르고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달리며 즐거웠을까.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주고 슬프면 나 지금 마음이 아프다고 울 줄도 아는 삶을 살았을까. 좋아하는 이에게 꼬리를 흔들며 웃어보였을까. 꼬리가 묻히기 전, 주인에게 미안하지는 않았을까. 자신이 떠난 시간 속에 남겨질 주인이 안타까워 미련이 남지는 않았을까. 남겨진 이의 슬픔이 걱정되지는 않았을까.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송순이는 꼬리가 묻히길 원할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정말, 꼬리를 묻어주는 것일까. 인간으로 태어난다는게 정말 축복일까. 인간이 된 송순이는... 꼬리를 묻어준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나는 아직 인간으로 산다는게 무엇인지 잘 몰라 송순이에게 인간의 삶이란 좋은 거라고 말해줄 수 없다. 내가 조금더 잘 살았다면 송순이의 꼬리를 조금은 덜 슬프게 묻어줄 수 있었을까. 만약 송순이의 꼬리를 묻는 날, 내가 그 꼬리를 안고 함께 묻힌다면 송순이의 환생은 조금 덜 외로울까. 인간이 된 송순이는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작은 것들까지는 사랑하지 않았으면 한다.



2020.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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