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0. 10주차
지난주 진료 이후 하루 병가를 냈다. 금토일 3일을 쉬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했다. 수다쟁이 고양이 달래와 사냥 놀이를 하고 친구를 만나고 가족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고... 그 일상 속에서 나는 마음이 아프다는 게 믿기질 않도록 밝았고 즐거웠다. 그런데 병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잘 웃다가도 문득 지금 내 웃음이 진짜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생겼다. 너무 오랜 시간 나의 우울을 얕잡아보며 무시한 결과인 걸까.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졌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 내가 지금 정말 즐거운 걸까.
병원에서 한 달가량 직장을 쉬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병가를 써도 월급이 나오는 복지가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도 내 병보다는 내가 일을 쉬게 되었을 때 내 몫만큼 다른 이들이 감당해야 할 일들을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도 버릇인지도 모르겠다.
병원을 다니기 시작하며 나는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름 사람 보는 눈썰미가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썰미는 형편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남 눈치를 안 보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산다고 자신했던 나는 사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을까,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걱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을 쉰다는 결정 역시 쉽게 내릴 수 없다. 버릇이니까.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나. 내 버릇 역시 지금 당장 이겨내기에는 버릇의 역사가 너무 길다.
약을 바꾸고 잠이 많아졌다. 충분한 수면 시간을 가지고도 오후까지 비몽사몽 자꾸만 엎드려 눈을 감게 된다. 너무 못 자서 괴로웠던 시간을 지나고 나니 이제는 너무 잠이 많이 와서 문제인 것이다. 중간이 없다.
엎드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했다. 사실 중간을 찾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가장 잘 사는 사람은 중간을 지키며 사는 사람일 거라고. 나는 평생을 그 중간을 찾아 헤맸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너무 잘 노는 아이들과 너무 모범생인 아이들 그 중간 어디 즈음에 머물고 싶어 했고 너무 건강하지도 않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체력을 가지려 했으며 너무 밝지도 너무 우울하지도 않은 정상 범위의 인간이 되고자 했다. 나는 몰랐지만 나는 항상 그렇게 노력해왔다. 그래서 그렇게 살게 되었다고, 그렇게 살았다고 믿었다.
약을 먹고 나서는 현기증이 나고 숨이 가빠지는 증상도 많이 줄었다. 샤워를 하다가, 자전거를 타다가 자꾸만 그 말이 떠오른다. 내가 운이 없었다는 말. 내가 운이 좋았다면 나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 있을까? If라는 가정을 자주 하는 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계속해서 궁금하다.
만약에 내가 제대로 잠이 들지 못했던 과거로 돌아가 일찍 병원을 찾았더라면, 만약에 내가 언니에게 나도 우울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더라면, 만약에 내가 내 우울을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내가 나도 우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도 인정했다면, 만약에 내가 정신적 의존에 익숙한 사람이었다면...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그냥 궁금하다. 가면을 쓰지 않은 나의 모습이.
오늘의 진료는 짧았다. 약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이어서 먹어보기로 했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쥐어짜 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