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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 Aug 09. 2021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운동을 하다


  멍청한 게 용감하기까지 하면 일을 치르기 마련이라고 환불이 불가하다는 6개월 분의 영수증에 호기롭게 서명할 때만 해도 미룰 대로 미룬 숙제를 해치웠다는 생각에 마냥 홀가분했다. 샤워를 마치고 당장 잠에 들지 않으면 뭐가 된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단 한 시간이라도 게으름 피울 여유가 있었더라면, 적어도 이 지독한 루틴이 주 4회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요가 예찬론자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요가원과 오십 보가 채 떨어지지 않은 정류장으로 던져지는 동안 천재지변을 바란 날이 수십. 그러나 지구는 어김없이 평온했다.

  재등록을 권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뒤로 회원증을 반납했다. 벌써 일 년이 더 지난 이야기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는 사이 돌연 퇴사를 작정했고 예상보다 이르게 거처를 옮겼다. 새 직장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모양새의 삶을 내게 권한다. 책임을 다하되 주인 의식을 갖지 마라, 퇴근 시간이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라. 회사가 보내는 메시지의 행간을 점치려 눈을 한껏 흘겨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정말로 퇴근시간에 맞추어 퇴근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당황스럽다. 갑작스럽게 변곡점을 맞았다.

  3개월을 권하는 은근한 영업에 재고 따질 것 없이 8개월 코스를 결제했다. 생산적인 취미 하나를 곁들이고서도 네다섯 시간이 남는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내게 주어진 대부분의 시간을 생각을 비우는 데에 쓴다.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여전히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지만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해가 있는 곳으로 척추를 당기다 보면 코끼리는 금세 마음 저편으로 비켜선다. 이렇게 수일을 보내면 애쓰지 않고서도 의연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저에게 소원했던 시간을 증명하듯 아직은 중심잡기에 거듭 미끄러지고 있지만 6개월이면 한쪽 발로도 어렵지 않게 바로 설 수 있음을 이미 경험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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